2020-10-06

미라쿨룸 - 더 라스트 레버레이션

셀화 총 5000장! PC-FX라서 가능한 역대급 애니메이션 RPG!!

1996년 PC-FX로 발매된 RPG. 개발은 PC엔진용 <스타트링 오디세이 1, 2> 등을 만들었던 레이포스, 발매는 NEC가 했다. 제목인 미라쿨룸(Miraculum)은 라틴어로 '기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NEC의 마지막 게임기 PC-FX

PC-FX용으로 나온 RPG는 딱 8종뿐인데, 그중에서 다른 기종으로도 있는 걸 빼면, 4종이 남고, 그 4종 중에서도 정통파 JRPG는 이 게임뿐이다. 망한 기종답게 극심한 RPG 기근이었다. 희귀한 게임이라 호기심이 생겨서 완성도 따지지 않고 해봤다. 레트로아크 Beetle PC-FX 코어로 아주 잘 돌아간다.

제국의 왕 지그발트는 군대를 동원해 찾아낸 유적에서 사신(邪神)을 발견한다. 사신에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요구하는 왕. 사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지만, 대신 왕의 영혼을 잠식한다. 왕은 마황제가 되고 강력한 힘으로 주변국들을 점령해나간다.

중세 판타지 배경인 줄 알았는데, 다음 장면에서 현대적인 연구소가 나오고, 거기서 폭발이 일어나며 한 남자가 탈주한다.

주인공 제이는 탈주병이란 오명을 쓰고 제국군에게 쫓기는 몸이다. 어느 마을에 도착한 그는 아이를 유괴하는 자들과 맞서다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그 와중에 만난 수도원 소녀 신디, 오덕 레이라, 닌자 한조와 함께 제국에 맞서는 이야기.

전투와 시스템 면에서 지극히 정통 일본식 RPG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제작사 작품이라 그런지 <스타트링 오디세이>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판타지에 SF를 섞었다든가 야시시한 장면을 넣는다든가... <스타트링 오디세이> 1편의 경우에는 왕도물 전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 게임의 경우는 초반 전개가 미묘하다. 일단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밝히지 않고 시작하며, 어린 아이들이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촉수물 야애니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서 좀 색다른 전개를 기대했는데, 어느 정도 비밀이 밝혀진 중반 이후는 왕도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그래도 <스타트링 오디세이> 1편보다는 향상된 느낌이다. 배경 음악도 듣기 괜찮다.

다른 JRPG에서 추가된 점이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과 밤, 날씨가 바뀐다는 점. 비와 눈이 내린다. 필드 전투에서도 날씨가 배경에 반영된다.

중간중간에 애니메이션이 풍부하게 들어가 있다. PC-FX의 특징이다. PC엔진용 게임보다 더 많은 영상이 들어가 있다. 딱 90년 초반 애니메이션 느낌이다. 주요 캐릭터의 일부 대화는 음성으로 나오는데, 이때는 자막이 없어서 일본어 듣기가 안 되는 사람은 불편할 수도 있다.

닌자 한조의 부하 이름이 김(キム)이다. 제작진 지인 중에 한국인 김 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닌자라고는 하지만, 상반신 복장은 공작왕 같았다.

게임은 기본에 충실하지만, 쓸데없이 넓은 여관, 비슷비슷한 신전과 던전 구조 등 걸작이 될 수 없는 단점도 보인다. 붉은 피와 시체가 묘사되고, 주인공의 과거는 암울한데, 게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고 약간의 개그도 있다. 암울함과 밝음의 갭에서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건 두 여성 캐릭터의 샤워 장면이었다. 해당 캐릭터가 있는 상태에서 럭랜드 또는 노스피크 마을의 숙소에서 자면, 일정 확률로 샤워 장면이 나온다. 딱 두 장면이니 보고 나면 거기서 계속 잘 필요 없다. 참고로 히로인 신디의 성우는 그 유명한 이노우에 키쿠코다.

게임을 쉽게 하려면, 디버그 모드에 들어가면 된다. 타이틀 화면에서 PC-FX 패드 기준으로 ↑, →, V, ↑, ←, VI, ↓, ↓, IV, IV, ←, →, V를 누르면, 소리가 나고 그 상태에서 게임을 시작하여 셀렉트 버튼을 누르면 아래에 창이 열린다. 다시 셀렉트 누르면 디버그 모드로 진입한다. 여기서 레벨 올리기, 랜덤인카운터 유무, 위치 이동 등 가능하다.

디버그 모드로 레벨, 돈 뻥튀기

게임은 꽤 긴 편이다. 다른 JRPG처럼 배, 잠수함, 비공정(전함) 다 나오고 다른 세계로 간다.

후반부 던전엔 퍼즐 요소가 있다. 문 여는 데 암호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서 기억력과 계산이 필요하다. 끝판왕은 양쪽 어깨에 있는 두 괴물이 HP 회복과 소생 마법을 써서 성가시다. 분업해서 공략해야 깰 수 있다. 제이, 한조로 발을 노리고, 레이라는 오른쪽 어깨 괴물를 향해 MP를 빼앗아 오는 마법을 쓴다. 어깨 괴물의 MP를 다 소진시켜야 본체가 되살아나는 걸 막을 수 있다. 전투는 템포가 빠르고 편리해서 쾌적한 편이다. 소환이나 마법 그래픽도 나쁘지 않다.

게임은 긴데, 엔딩은 검은 화면에 스태프롤만 나와서 여운을 즐길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이라도 넣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주인공과 히로인이 맺어지는 장면도 없어서 아쉽다.

엔딩을 본 뒤 리셋해서 세이브한 데이터로 다시 하면, 숨겨진 보스가 있는 바벨탑으로 갈 수 있다. 10층에 가면 끝판왕 루시퍼와 또 싸우게 되는데, 전보다 훨씬 강해져서 깨는 데 오래 걸린다. 이거 깬다고 특별한 보상은 없다. 추가 장면 같은 것 없이 몇 줄 대사 나오고 끝이다.

걸작과는 거리가 있는 게임이지만, 수작 정도론 평가할 수 있겠다. PC-FX에 이런 (야시시한) 정통파 RPG가 좀더 많았다면, 그렇게 힘 없이 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엔딩 본 날 - 2020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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