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5

스타트링 오디세이 PS1판

1993년 PC엔진으로 나왔던 RPG인데, 1999년에 플레이스테이션1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제작사는 훗날 새턴판 <영웅전설 하얀 마녀>를 만드는 레이포스.

이 게임은 PC엔진으론 2편까지 나왔다. 2가 1보다 앞선 시간대를 다룬다. 2편 주인공이 1편 주인공의 아버지다. 이 부분은 슈퍼패미컴 RPG <에스트폴리스> 1, 2와 비슷하다. 두 게임의 1편은 같은 해에 나왔고, 2편은 <스타트링 오디세이2> 쪽이 1년 먼저 나왔다. 어느 쪽이 참조한 건지 모호하다.

난 오래 전에 PC엔진판 2편을 먼저 깼다. 왕도물이지만, 여주인공의 노출신과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20년 후 이야기인 1편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긴 세월이 지났는데, 문득 생각나서 리메이크된 플스1판을 ePSXe로 해봤다.

소피아 - PC엔진판 vs 플레이스테이션1판

플스1판의 그림체는 PC엔진판과 달랐다. 캐릭터들이 날카롭게 변했다. 특히 여주인공 소피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난 PC엔진판 소피아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PC엔진판 2편 히로인이 1편 주인공 어머니. 오른쪽이 20년 후 모습.

2편 주인공이 남긴 아들이 20세인 시점에서 게임이 시작된다. 2편 히로인이 홀로 키운 아들이다.

캐릭터가 큼지막하고, 걸음이 빨라서 플레이가 쾌적했다. 첫인상은 괜찮아 보였다. 그래픽도 깔끔한 편이고, 시스템은 기본을 잘 갖췄다.

왕도물이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전개나 연출이 너무나도 전형적이다. 특별한 일 없이 JRPG에서 흔하디흔한 스토리로 진행된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그랬듯이 투신의 피를 이어받아 지상 최강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마족을 물리치는 숙명을 아무 고민 없이 받아들인다. 히로인은 처음부터 주인공을 좋아한다.

진행되는 에피소드들이 작위적이고 뻔해서 어떤 감동을 받긴 어려웠다. 몇몇 조연의 죽음이 있지만, 놀랍진 않았다. 오글오글한 대사가 많고, 전투 음악은 특촬 변신물 음악 같다. 그래픽은 깔끔했지만, 전투 화면만큼은 지저분한 느낌이다.

플스이니까 3D 화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은데, 캐릭터들이 3D가 아니라 페이퍼 마리오처럼 2D 종이 인형이라서 실소가 나왔다. 이럴 바엔 그냥 원작의 2D 화면이 낫지 않았을까.

PC엔진판 1편의 전투 화면

필드 화면에선 가까이 가야만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곳은 마을 사람에게서 위치 정보를 들어야만 보인다. <파이널 판타지>처럼 배, 잠수함, 비공정 다 나온다. 미지의 장소를 발견하는 재미는 있었다.

인기가 없었는지 플스1판 공략은 일본 웹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PC엔진판 공략을 참조했지만, 다른 점이 많아서 오히려 헷갈렸다. 과거 JRPG들이 흔히 그렇듯이 중반 이후엔 끝판왕을 물리치기 위한 필수 아이템들을 모아야 한다. 공략이 없어서 이 과정이 힘들 줄 알았는데, 아이템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는 캐릭터가 있어서 비교적 수월했다.

보스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대사를 한다. 주인공 일행에게 지면, "이럴 수가! 내가 이런 하등한 인간들에게 지다니"라고 자신이 진 게 믿을 수 없다는 대사를 날리며 죽는다. 자신들을 멸망시킨 영웅의 아들인데, 너무 깔보는 거 아닌가.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2편처럼 여탕 엿보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서비스신이 뻔한 왕도물을 그나마 살려주는 건데, 플스판 1편은 수위가 낮다.

2편도 리메이크 예정이었으나 플스판 1편 판매량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인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엔딩까지 보니 일러스트가 더 취향인 PC엔진판을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2편의 몇몇 인물은 1편에서도 등장하는데, 2편 깬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 인물이 누구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런 반가움을 느끼려면, PC엔진판 2편을 깬 뒤, 바로 1편을 하는 것이 좋겠다.

엔딩 이후 좀 기다리면, 자동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레벨과 장비는 그대로 승계된다. 그리고 라스트 던전에서 열리지 않던 문을 열면, 숨겨진 보스가 나오고, 그걸 이기면 엔딩 이후 스페셜룸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스페셜룸에선 후속작과 이어지는 복선, 비주얼 감상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보기 위해서 다시 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JRPG라고 생각한다.


엔딩 본 날 - 2020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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