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8

일본어 모르고 클리어한 일본어 게임들

지금은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어서 일본어 게임도 할 수 있지만, 콘솔 게임을 한창 즐기던 90년대 초반까진 일본어를 거의 몰랐습니다.

게임 한글화가 극히 드물었던 시대라서 패미컴, 메가드라이브, PC엔진, 슈퍼패미컴의 인기작들은 거의 일본어로만 즐겨야 했죠. 액션이나 슈팅 게임은 일본어로 나와도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RPG, SLG, ADV 쪽 게임은 일본어를 모르면 진행이 힘들었고 재미도 느끼기 어려웠죠.

하지만, 오락실에서 볼 수 없었던 장르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워낙 컸기에 일본어를 모르면서도 일본어가 난무하는 게임에 도전하곤 했습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해 중간에 포기했던 게임이 많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제가 클리어했던 일본어 게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드래곤볼Z 1 / 2 / 3 / 외전 (패미컴)

저뿐 아니라 일본어 모르는 다른 분들도 당시 엔딩 보신 분 많을 것 같습니다.
일본어 게임이지만, 만화책으로 이미 내용이 알려진 터라 일본어로 무슨 대사가 나오는지 추측이 어렵지 않았죠.

다만, 원작 만화에 없었던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기에 그 부분은 공략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3편의 경우는 인조인간을 맵에서 찾아다니는 부분이 있는데, 동서남북을 일본어로 모르면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제가 했을 땐 공략이 나오기 전이라서 일본어 사전에서 동서남북을 찾아 방향을 유추했습니다.

1, 2, 3편 모두 일본어 몰라도 원작 만화와 공략을 보면 누구나 깰 순 있었습니다(오리지널 스토리인 외전은 더 어려웠음). 그래도 공략과 만화에서 다루지 않은 일부 장면의 일본어는 알 수 없어서 그 부분이 궁금하긴 했습니다.

삼국지 1 (패미컴) / (메가드라이브) / (슈퍼패미컴)

패미컴판 1편은 MSX2판과 달리 메뉴의 명령어가 한자가 아닌 히라가나로 되어 있어서 난감했습니다. 히라가나로 된 명령어의 뜻을 일한사전에서 간신히 찾아서 MSX2판 삼국지 공략과 대조해가며 알아냈습니다. 패미컴판 삼국지 1의 경우는 명령어 앞에 번호가 달려 있어서 덜 헷갈렸어요. 익숙해지니 게임 할 수는 있겠더군요.

인명은 한자로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한자를 배워서 쉬운 한자는 대충 읽을 수 있었고 모르는 한자는 옥편 찾아서 그 무장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어요.
여러 번 엔딩을 봤네요.

삼국지열전 (메가드라이브)

일기토가 액션이었던 세가의 삼국지 전략 게임 역시 일본어 모른 채로 했지만, 코에이 삼국지 했던 경험으로 금세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캡틴 츠바사 2 (패미컴) / (슈퍼패미컴)

이것도 일본어 모르고 엔딩 본 분 많을 것 같아요. 같은 패턴의 경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뭐가 태클이고 뭐가 슛인지 익히면 게임을 진행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경기 후 나오는 비주얼 장면의 대사는 뭔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저 비주얼이 멋져서 감탄하며 볼 뿐이었죠.

만화책을 안 봐서 내용도 몰랐지만 엔딩을 봤습니다. 나중에 보니 게임은 원작 만화와 다른 오리지널 스토리더군요.

SD건담 외전 나이트 건담이야기 3 (패미컴)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엔딩을 본 RPG라서 기억에 남습니다. 해당 언어를 모르고 RPG를 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노잼일 수 있는데, 그래도 도전한 것은 게임챔프에서 공략을 자세히 내줬기 때문이죠.

모든 대사가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그 공략만 보고 따라 하면 엔딩은 볼 수 있었어요.
큰 줄기만 공략으로 알고 자세한 내용은 유추할 수밖에 없었지만, 엔딩을 볼 땐 감개무량했습니다.

샤이닝 포스 (메가드라이브)

삼성전자 정발팩을 구했는데, 거기에 한글 대사집이 들어 있어서 그걸 보고 내용을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게임의 대사와 한글 대사집을 대조해가면서 했지요.

그리고 다른 RPG처럼 광활한 맵을 돌아다니지 않고 마을에서 대화 후 시뮬레이션 턴제 전투가 반복되는 형식이라 헤맬 일이 없었습니다.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 VOL 2 (PC엔진CD)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디지털 코믹화한 게임입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내용을 알더라도 장면을 넘기려면 적절한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데, 일본어를 모르니 그냥 모든 메뉴를 하나씩 다 선택해보는, 무식한 방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죠.

대사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했던 까닭은 애니 수준의 비주얼신만 봐도 마냥 행복했거든요. 거기에 성우 음성과 BGM도 끝내줬어요. 캐릭터 옷을 벗기는 가위바위보 게임도 강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에메랄드 드래곤 (PC엔진CD)

비주얼신과 성우 음성이 인상적이었던 RPG. 게임의 일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PC통신에서 누가 쓴 TXT 공략을 보고 클리어할 수 있었습니다.

클리어했지만, 스토리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전혀 안 나요. 지금은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으니 제대로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천외마경 2 (PC엔진CD)

PC엔진의 간판+대작 RPG. 게임월드 잡지에서 3개월 동안 공략을 해줘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그 공략이 너무 부실해서 그것만으론 클리어가 힘들었어요. 모자른 부분은 PC통신의 공략을 보고 진행했네요.

엄청난 비주얼신과 성우 음성 덕에 일본어 몰라도 재미났어요. 하지만,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그냥 유추할 뿐이었죠.
어떻게 깼는지 지금 봐도 신기합니다.

훗날 PS2 리메이크판을 하면서 당시 몰랐던 스토리를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면서 일본 RPG를 한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 같아요. ㅋㅋㅋ 그만큼 당시엔 새로운 게임 장르에 대한 열정이 어마어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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