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1

90년대 게임점의 추억 2 - 반포 앤트워프

앤트워프는 게임챔프 1992년 12월호 광고로 알게 된 매장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마크로스>, <아키라>, <드래곤볼> 등 일본 애니에 빠져 있던 때라 애니OST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앤트워프에서 일본 애니와 게임 OST CD를 테이프로 복사해서 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는 장장 1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으로 갔습니다.

고속터미널역에서 내리면 건너편에 반포쇼핑타운이 있었는데요. 이 안에 게임 가게와 일본 원서 서점이 있었습니다. 게임 가게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 ‘토탈게임 반포점’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앤트워프 가기 전에 이곳들을 들르는 게 당시 제 반포 투어의 첫 일정이었습니다.

토탈게임 반포점(?)은 안경 낀 대머리 아저씨랑 그 부인분이 운영하는 작은 게임가게였는데, 애들로 늘 바글거렸습니다.

패미컴과 메가드라이브의 정품 팩이 제법 있었어요. 가격은 비싼 편이었습니다. 주인 아저씨아줌마랑 늘 흥정해야 했죠.

제가 어떤 팩으로 바꾸려고 교환비를 물어보니 아저씨가 너무 비싸게 불렀어요. 시세를 알고 있던 제가 흥정하자 아저씨가 그 가격으론 절대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비싸서 안 바꾼다고 했더니 아저씨와 아줌마 얼굴에서 당황한 표정이 0.5초 지나가는 걸 봤습니다. 꼬마라서 넘어갈 줄 알았나봐요. 아줌마가 나서서 “에이~ 좀 싸게 해줘요”라고 선심쓰라는 듯이 남편에게 말했어요. 그 아저씨는 응하지 않고 고가격을 고수했습니다. 저도 그만뒀죠. ㅋㅋ

솔직히 제 팩이 더 인기 있는 거라서 기본 교환비로 바꿔줘도 그 가게 손해는 아니었을 텐데, 저처럼 순진무구한 학생을 상대로 몇 천 원 더 받으려는 모습이 짜증났어요. ㅎㅎㅎ

찾는 롬팩이 매장에 없으면 주문을 따로 받는 곳이었어요. 원하는 게임 적고 선금 내면 일본에서 사다주겠다 이거죠.

주문 받는 거 되게 적극적이던데 비싸게 받을 거 뻔해서 전 한 번도 이용 안 함. 주인 아저씨나 아줌마나 둘다 애들 벗겨먹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라 약삭빠르게 이득을 잘 챙겼어요.
시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저는 잘 안 넘어갔죠.

그 근처엔 일본 원서만 파는 서점이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아줌마가 운영하는 서점이었는데,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군요.

주인 아줌마는 불친절했습니다. 살 사람 많다는 식으로 배짱 장사했어요. 책값도 원가의 거의 2배는 받은 것 같아요.

그래도 일본 원서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여기서 종종 샀죠. 주로 파는 건 일본 만화, 일본 잡지, 애니 관련 브로마이드였습니다. 제가 산 건 패미컴과 슈퍼패미컴 잡지, 만화책 등이었습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주제에 보겠다고 산 거죠.

반포쇼핑타운에서 앤트워프를 가려면 구반포행 버스를 탔어야 했어요. 한 정거장 가서 내리면 세화여고 부근 상가에 앤트워프가 있었죠.

이곳은 예전에 갔던 용산 만트라 이상으로 갖고 싶은 물건들이 가득했습니다.

MSX에도 조예가 깊은 매장이라고 하는데, 당시 저는 이미 MSX를 졸업한 상태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가게에 진열된 애니 굿즈들이 근사하더군요. 드래곤볼이 한창 인기 있던 시기라 드래곤볼 브로마이드가 많이 보였어요. 란마도 있었구요.

애니와 게임 OST CD들도 있었는데, 5000~6000원에 일제 테이프로 녹음해서 팔았습니다. 제 첫 방문 목적은 이거였습니다.

어떤 20대 손님은 사갔던 드래곤볼 애니 OST 테이프를 들고 와선 "음악 수준이 너무 떨어지니 다른 걸로 바꿔달라"는 생떼를 썼어요. 멀리 지방에서 이것 때문에 왔다며 한 20분을 징징댔는데, 남자 알바생이 안 바꿔주더군요.
포기하고 손님이 가니까 알바생 누나가 "불쌍한데 바꿔주지 그랬어" 했지만, 남자 알바생은 고개를 절래절래.

매장엔 알바생이 3명 정도 있었어요. 예쁜 누나 알바생은 게임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남자 1명은 게임에 관해 잘 알더라구요.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1시간 이상 죽치고 구경했습니다. 애니 굿즈와 함께 슈퍼패미컴, 메가드라이브, PC엔진, MSX 게임이 즐비했어요. 거기서 PC엔진 슈퍼CD-ROM2 게임 오프닝을 난생처음 봤어요.

<천외마경2>와 <영웅전설1>을 계속 틀어놓고 있었는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넋놓고 봤습니다.
'이것이 잡지로만 보던 CD롬 게임이구나. 저런 오프닝이 가능하다니 ㄷㄷ'

그 오프닝들이 소유욕을 마구 자극해서 당장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당시 PC엔진이 없었던 저는 군침만 흘리고 말았죠.
돈도 없어서 처음 가서 산 게 OST 테이프 2개(이스3, 드래곤볼)가 전부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갔을 때는 뭘 살지 정해놓고 갔습니다. 메가드라이브용 이스3 아니면 엑자일 둘 중 하나를 사려고 했죠. 매장 가서 두 게임을 살펴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이스3는 검증된 유명작이고, 엑자일은 지명도는 떨어졌으나 케이스 표지의 주인공이 멋드러져서 끌렸죠.

이스3가 일본어 덜 나와서 즐기긴 더 편할 텐데... 근데 이미 타기종판 잡지 분석으로 내용 다 아는데 김 빠지지 않을까...
그러면 엑자일 쪽이 더 신선한 거 아닌가... 하지만 엑자일을 일본어 모르는 내가 깰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게임을 잘 아는 대학생 점원이 엑자일보다는 이스3 쪽을 권하길래 이스3로 결정!

요즘 같으면 둘 다 사고 말 텐데, 당시엔 돈이 많지 않으니 게임 하나 고르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앤트워프는 매장이 넓고 볼거리 많아서 한 번 가면 오래오래 구경하고 싶었어요. 저 매장을 통째로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죠.

알바생들도 용산 장사치들에 견주면 친절한 편이라 당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너무 멀어서 자주는 못 갔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90년대 초 제가 다닌 게임 매장 중에선 가장 쾌적하고 볼만했던 곳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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