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8

80~90년대 해적판 만화들

80~90년대 초 서점, 만화방, 문방구에서 있었던 만화들입니다.
즐길 거리가 지금만큼 풍족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애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죠.

그 시절엔 우리나라에 저작권 보호는 없다시피 해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던 일본 만화를 국산 만화로 둔갑시켜서 마구 들여왔습니다. 마치 한국 사람이 그린 것처럼요. 당시 사회 풍조와 정책 탓에 일본 만화를 그대로 들여올 수 없기에 출판사들이 그런 편법을 썼던 것 같습니다. 

일본만화 거의 그대로 복사 인쇄해서 낸 것도 있었고, 한국인이 비슷하게 베껴서 낸 것도 있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그 시절 해적판 만화들을 소개합니다.

<바벨 2세>

유명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걸작.
슈퍼로봇대전팬들에겐 자이언트 로보로 더 유명한 작가.
초능력을 물려받은 바벨 2세와 요미의 처절한 싸움을 그린 작품.
어린 시절엔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바벨 3세>

인기에 힘입어 김형배 씨가 바벨 3세를 그려서 내놨는데, 공식적인 속편은 아니었죠. 원작자 허락도 안 받고 그린 김형배 씨의 흑역사. 아마 출판사에서 요구했겠죠.

바벨 2세를 너무 재밌게 본 저는 만화방에서 엄청 기대하면서 펼쳤는데, 그림체도 전혀 다르고 내용도 노잼이라서 대실망했어요. 내가 아는 바벨 2세가 아니라면서요. 어린이의 눈은 어른들 상상 이상으로 날카롭습니다.

<내 이름은 101>

바벨 2세의 진짜 속편은 이겁니다.
만화방에서 이걸 발견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뭔가 사족 같은 내용이긴 했지만, 바벨 2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 열광했습니다.

<세컨드맨>

제가 본 제목은 <냉동인간>으로 기억하는데, 원제는 <세컨드맨>입니다. 여러 제목으로 나왔는데, 한국인이 새로 그려서 내놓은 것도 있었어요.

초능력을 지녀서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한 주인공이 냉동에 들어가는데 깨어나서 보니 세상은 컴퓨터에 지배 당했고 인간은 거의 멸종 직전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초능력으로 인류 존망을 걸고 컴퓨터 군단과 싸우는 내용.
당시 너무 재밌게 읽어서 원서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마즈>

바벨 2세랑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초능력자 주인공, 그를 따르는 로봇.
지구인이 우주 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외계인들은 그들이 지구에 심어놓은 마즈에게 지구 파괴를 명하지만, 친절한 지구인들 집에 머물렀던 마즈는 지구를 지키기로 합니다. 지구 파괴를 위해 마즈를 공격해 오는 외계인의 로봇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의 결말에 놀랐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운이 많이 남아요. 나중에 애니메이션으로 봤는데, 그 결말을 바꿔놔서 실망했습니다. 보실 분은 만화로 보시길.

<일격전>

우리나라에서 권법소년으로 통했죠.
인기가 엄청나서 그 시절 국ㅁ... 초등학생, 중학생들 다 봤을 겁니다.
중국 무술 고수인 엄마와 그 아들 한주먹 이야기.

한주먹이란 주인공 이름은 아주 찰떡같아요. 나도 권법 잘해서 학교에서 주목받고 싶다는 초등학생의 열망이 이 만화에 열광하게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싸우는 게 늘 메인은 아니고, 중간중간 찡한 이야기도 있고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한주먹을 좋아해서 약속을 잡고 그가 오길 기다리는 못생긴 여자애가 있었는데, 한주먹이 그 약속을 잊고 애를 기다리게 하자 한주먹 엄마가 화나서 한주먹을 패는 장면.

자기 자식이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확실히 교육하는, 훌륭한 엄마였구나 하고 지금 와서 생각합니다.

<초인 킨타맨>

유치했지만, 웃겨서 은근히 인기 있었던 쿤타맨.
울트라맨, 가면라이더, 건담을 패러디한 캐릭터 나오는데, 그 작품들이 당시 한국 TV에서 방영한 적은 없어도 미니대백과나 프라모델로 꽤 알려진 상태였죠.
가면라이더를 메뚜기가면맨이라고 지은 게 재밌었어요.
저질 유머가 난무하는데, 그 시절엔 먹혔습니다.

<철권 친미>

여러 권 발매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용소야 시리즈.
당시 이거 안 본 애들이 없었을 거예요.
대림사 권법 수련생 용소야의 일대기.
기억에 남는 대결은 미국 복서와 싸우는 거. 중국무술과 복싱의 대결이어서 색달랐습니다.
마지막에 공중뒤돌려차기가 기억에 선명합니다.
후에 애니 비디오 테이프로도 나와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용소야 캐릭터로 축구하는 만화도 있었어요. 나름 재미나게 봤습니다.

글그림 성운아인데, 다이나믹콩콩코믹스의 전속 작가였죠. 쿤타맨도 그리고 용소야도 그리고... 같은 작가인데 어떻게 그림체가 저리 다를까...
이렇게 재미난 만화를 그리면서 왜 <보물섬>을 비롯한 당시 메이저 잡지에는 왜 연재를 안 할까... 하고 어린 시절 생각했죠.
훗날 해적판용 유령 작가인 걸 알고 대실망했지만요.

<아칸베>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명랑만화. 베개를 캐릭터로 했다는 것부터가 웃깁니다.
"메롱!" 하면 반대 상황으로 만드는 초능력이 메롱이에게 있습니다. 가령 개와 개 주인 위치가 바뀐다든가... 돈 주는 사람과 돈 받는 사람이 바뀐다든가...
뭐가 반대 상황이 될지는 초능력을 쓰는 메롱이도 모릅니다.

<도라에몽>

1980년대에 <동짜몽>이란 제목으로 만화방에 있었습니다.
동짜몽은 '동글동글 짜리몽땅'을 줄인 말이랍니다. 지금 봐도 정말 놀라운 네이밍 센스 같아요. 도라에몽이란 이름은 일본어라서 거부감이 있는데, 동짜몽은 친근하고 모습이 딱 떠오르는 찰떡같은 이름이죠.
만화방에서 엄청 재미나게 읽었어요. 뭐든 나오는 도라에몽의 주머니가 어린 시절 너무 부러웠죠.

<퍼맨>

원제는 퍼맨. 슈퍼맨에서 슈를 빼고 퍼맨이라고 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밋밋한 이름이라고 출판사가 판단했는지 우리나라에선 빠삐용으로 바꿨어요.
고전 영화 빠삐용이 한창 TV에서 방영할 때라서 왜 하필 빠삐용으로 했는지 어린 시절엔 어이없었죠.

주변에선 그렇게 인기가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전 재밌게 봤습니다. 패미컴 게임도 나왔죠. 도라에몽 작가 작품이라 도라에몽 애니에도 출연한 적 있습니다.

<대쉬! 욘쿠로 (달려라 부메랑)>

한국에선 SBS에서 <달려라! 부메랑>이란 이름으로 애니를 방영했다는데, 전 그때 못 보고 이 해적판으로 봤습니다.

그 시절에 타미야 미니카가 애들 사이에서 인기였습니다. 타미야 프라모델 전문점 앞에 매주 트랙을 설치해놔서 미니카 경주가 열렸는데, 거기서 1등 하려고 애들끼리 미니카를 어떻게 하면 빠르게 할지 궁리했죠.
차에 돈을 처바를수록 빨라졌습니다. 모터를 고성능으로 바꾼다든가...  일부 부품을 공기 저항이 덜한 것으로 바꾼다든가...
결국 부잣집 애가 1등.

만화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경주에서 늘 하위권이었던 신세를 이걸 보며 대리만족했습니다.

<아이언 머슬>

마징가Z로 유명한 나가이 고 작품입니다.
로봇에 사람이 타고 레슬링 경기를 벌인다는 내용인데, 나가이 고답게 잔혹하고 기괴합니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캐릭터가 비참하게 패하는 모습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어요.

다음 편도 계속 보고 싶었는데, 일본에서도 인기가 없었는지 챔피언에게 도전한다는 내용까지 나오고 끝.

<프라레스 산시로>

미니 로봇을 조작해서 프로레슬링시키는 만화.
인기가 상당히 좋아서 나중에 <킹 오브 프라파이터즈 98>로 제목을 바꿔 냈다고 하더군요.
저 로봇 너무 갖고 싶었어요. 내가 만든 프라모델 로봇으로 다른 애들 로봇과 싸움시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상상했죠.

<프라모 쿄시로>

프라모델을 컴퓨터에 스캔시켜서 시뮬레이션 배틀을 하는 만화.
지금 생각하면,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시대를 앞서간 놀라운 발상이네요.
건담 프라모델에 심취했던 저로선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프라모 천재 에스퍼 타로>

발키리(해적판 만화에선 건담V) 프라모델과 자신을 일체화할 수 있는 초능력자 주인공이 같은 능력을 지닌 적들의 프라모델과 싸우는 내용.
첫 작품만 봤는데, 마크로스, 스페이스 간담V를 좋아해서 이 만화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우주 해적 코브라>

양키 센스가 강했던 작품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미국 만화인가 했죠.
성인 만화 같은데 그렇고 그런 장면은 안 나와서 실망이었고...
원서 보면 야한 장면 나오는지 궁금했습니다.


해적판은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그것들이 제 추억이 되어버려서 외면할 수가 없군요.
그 시절 재밌게 봤던 만화는 원서나 정식발매판을 다시 찾아 가끔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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