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1

90년대 게임점의 추억 3 - 안양 으뜸

때는 1993년. 저는 패미컴과 메가드라이브를 거쳐 슈퍼패미컴 보유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게임월드의 강력한 라이벌 게임챔프가 나와서 일본 일러스트를 쓴 갈쌈한 표지와 부록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게임 구경하러 용산 만트라반포 앤트워프에 가는 건 즐거웠지만, 집이 서울 외곽이라 1시간 넘게 걸리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집에서 버스로 30분 안에 갈 수 있는 안양역 근처에서 게임점을 발견했습니다. 안양역에서 내려오면 보이는 안양 지하상가 내부에 있던 곳입니다. 당시 안양 일번가는 안양시 최고의 번화가로 늘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본 백화점, 벽산 쇼핑, 대동서림이 있었으며, 안양 지하상가에도 손님이 많았죠.

안양 으뜸은 평수는 넓지 않지만, 재믹스 때부터 게임가게를 해왔고, 어느 시점부터 용산 으뜸게임유통의 안양 체인점으로서 간판을 달고 운영했습니다.

용산 본점과 똑같은 시스템인지는 모르겠지만, 5회 거래시 무상 교환, 30회 거래 시 게임팩 무료 지급이라는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팩을 구입하거나 교환하면 종이 카드에 도장을 찍어주는 방식으로 기억합니다.

게임 팩 가격들이 싸다곤 할 수 없지만, 용산과 견주어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었고, 또 다른 관심사였던 애니·게임 OST도 여기서 테이프로 팔고 있었기에 반포 앤트워프처럼 집에서 먼곳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시기 애니·게임 OST는 진화해서 전처럼 테이프에 복사해서 판매하는 게 아니라 리어카 짝퉁 테이프처럼 패키지를 제작해서 제품으로 팔았습니다. 인쇄 질은 뭐 조악했지만, 나름 표지와 곡명이 있었어요. 음질은 CD를 일본산 테이프에 복사한 것에 견주어 딱히 낫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으뜸 안양점은 당시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와 그 부인이 운영했습니다. 보통 부부가 상주했고, 두 분 중 한 분은 볼일 있을 때 자리를 비우곤 했습니다.

1993년부터 저는 집에서 가까운 이곳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슈퍼패미컴 롬팩을 봤죠. 자주 보니 주인 아저씨가 절 기억했습니다. 어느 날은 커피도 주시고 그랬어요.

가게는 늘 애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제일 많이 보이는 건 중학생 남자애들이었어요. 매일 상주하며 게임하는 애들이 많았어요. 어떤 애가 학교에서 시험 잘 봐서 높은 등수에 들었다고 자랑하자 주인 아줌마가 맨날 게임하면서 어떻게 그 등수냐고 못 믿겠다는 투로 말하더군요. 별의별 자질구래한 수다가 들리는 매장 분위기였습니다. 앤트워프, 만트라 같은 곳보다는 좁고 산만하긴 했어요.

가끔 알바생도 썼어요. 기억나는 남자 알바생 중 하나는 19~20살 정도로 보였는데, 매장에서 답답하게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있었어요.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어떤 아줌마 손님이 초등학생 아들과 같이 와서 현대슈퍼컴보이를 사러 왔는데, 박스는 있었지만, 중고로 보이는 걸 9만원 부르더군요. 아줌마가 무슨 중고가 9만원이냐고 투덜거렸는데, 그 알바생이 중고 아니라며 가격 방어했어요. 뭐 알바생이라 가격 깎아줄 권한도 없었죠.

안양 으뜸은 오락실 주인에게도 게임을 팔았어요. 슈퍼패미컴판 <월드 히어로즈 2>를 틀어주며, 오락실 기판과 똑같지 않느냐고 여러 번 강조하시더군요. 오락실 기판을 사는 것보다 슈퍼패미컴판이 많이 저렴했던 모양이에요.

오리지널과 슈퍼패미컴판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오락실 주인 아저씨는 그걸 오락실에 들여놓으려고 낼름 사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슈퍼패미컴으로 이식이 잘 되었다 한들 성능상 오락실 원작과는 차이가 있을 텐데... 저걸 오락실에서 해본 게이머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동종업계 종사자인 게임매장 가게 아저씨가 으뜸 찾아와서 얘기 나누는 걸 들은 적도 있는데, 자기 매장 영업 끝난 시간에 고등학생 애들이 문 따고 들어와서 매장의 물건을 도둑질해갔대요.

나중에 잡고 보니 한 명은 게임에 미친 애였고, 한 명은 그 물건들 팔아서 돈 만들 속셈이었다나... 걔가 다른 매장에 장물 팔러 왔다 잡힌 모양이에요.

보안 장치 같은 거 서로 정보 교환하더라구요. 지금처럼 CCTV나 세콤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죠.

제가 슈퍼패미컴을 들인 뒤, 즐겁게 게임하긴 했지만, 치솟는 롬팩값에 패미컴 시절에 견주어 게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패미컴은 저렴한 복제팩이 많아서 큰 부담이 없었지만, 슈퍼패미컴은 현대가 종종 단속해서 그런지 복제팩이 안 보였어요. 삼성 알라딘보이 쪽은 더 심해서 단속 걸린 업체는 게임챔프에 사과문 올리기도 했습니다.

슈퍼패미컴 신작은 나올 때마다 가격이 비쌌어요. 6만원 넘는 건 흔했고 인기작은 10만원 넘기도 했죠. 2~3만원은 모를까 5만원 넘는 롬팩을 사기엔 용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슈퍼패미컴 전성기라 화제작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정작 저는 패미컴 때보다 즐기는 게임 수가 대폭 줄어서 갈증이 심했죠.

그러다 UFO라는 백업 기계의 존재를 PC통신과 잡지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법 기계라서 매장에 내놓고 팔지를 않아서 어떻게 구입해야 할지 몰랐죠.

한동안 잊고 있다가 안양 으뜸점에서 아저씨가 UFO란 게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가격은 16만원이고, 주문하면 자기가 용산에서 가져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16만원이라는 돈이 부담되긴 했지만, 잘 계산해보면 롬팩을 몇 개 사는 것보다 그걸 사는 게 이익이라는 결론이 섰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불법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그걸 썼다고 온라인에서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어둠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저씨에게 주문하고 며칠 뒤 UFO를 받으러 갔어요. 아침에 매장 열기 전부터 가서 아저씨가 벌써 와 있냐고 눈이 휘둥그레...

UFO도 하이퍼, 패왕, 가마스 등 여러 모델이 있었는데, 제가 산 것은 하이퍼 초기 모델이었습니다. 16메가비트 롬팩까지만 디스켓으로 백업이 가능했죠. 16메가비트 이하 게임이라도 몇몇 게임은 돌아가지 않았어요. 특히 가장 하고 싶었던 <파이널 판타지 5>가 안 돌아가서 슬펐습니다.

주변에 롬팩을 많이 가진 친구가 있었다면, 빌려서 디스켓으로 복사했을 텐데, 제 주위엔 그런 친구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안양 으뜸점에서 디스켓 한 장당 5천원 주고 복사했죠. 복사는 셀프였어요. UFO도 제 것 가지고 가서 롬팩을 직접 복사했죠. 복사 끝나면 잘 실행되는지 확인하려고 디스켓을 몇 분 돌려야 했습니다. 12메가비트 넘는 게임 롬팩들은 디스켓 2장이 필요해서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혹시 단속에 걸리지 않을까 살피면서 빨리 하라고 재촉했어요. 손님 많을 때는 나중에 하라고 했죠.
내 돈 주고 복사하는데, 눈치 봐야 하는 그런 환경이었습니다.

좀 지나니 PC통신에 슈퍼패미컴 롬파일들이 올라와 있어서 나중엔 그 짓 안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UFO로 게임을 무한정 하다보니까 게임불감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PC통신 장터를 통해 슈퍼패미컴+UFO를 PC엔진DUO로 맞교환했지요.

PC엔진DUO로 바꾼 뒤론 안양 으뜸 가서 PC엔진 CD들을 보는 게 일과였어요. 늘 화면으로 켜놓은 슈퍼패미컴 게임들과 달리 PC엔진 CD 게임들은 안양 으뜸 매장에선 켜놓지 않았고, CD들도 요청해야 보여줬어요. CD 박스 안에서 하나하나 보며, 장고 끝에 구입했지요.

PC엔진판 <랑그릿사>와 <이스 4>를 여기서 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PC엔진 CD가 매장에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발길을 끊고, 결국 용산전자상가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듣기론 안양 으뜸점은 2013년에도 플스4를 팔고 있었대요. 그 시점엔 나이 좀 드시고 안경 쓰신 아줌마가 주인이었다고 하던데, 제가 아는 그 아줌마인지 바뀐 주인인지 알 수가 없네요.

2015년에는 폐업했고 매장엔 임대문의가 붙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20년 넘게 운영되던 안양의 게임매장 으뜸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