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7

벤케이 외전 모래의 장

1992년 선소프트가 슈퍼패미컴용으로 발매한 벤케이 외전(PC엔진)의 속편. 전작에서 85년이 지난 1274년이 배경이다.
몽골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 원(元)은 일본 정복을 노리고 바다를 건너지만, 폭풍을 만나 실패한다. 이 폭풍이 일본의 술법이라고 본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칸은 주혼(呪魂) 장군들을 일본으로 보낸다. 이에 일본의 장군 지슈(時宗)는 주혼들을 물리치기 위해 전국에 법력자들을 파견한다.
이 싸움에 모래(沙)의 피를 이어받은 주인공과 그 일행이 휘말리는 이야기.

실제 역사에 나오는 인물이 여럿 등장하지만, 가상의 역사다. 일본의 영웅 요시츠네를 칭기스칸과 같은 급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주인공은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과 그 일행의 이름을 도트로 그릴 수 있다. 아래처럼 한글로도 그릴 수 있다는 얘기.

한글화는 안 되어 있지만, 이름만이라도 한글을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전작보다 전투가 다소 쉬워졌으며 템포도 빨라졌다. 메뉴 창을 매번 열어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점도 버튼 한 번으로 가능하게 개선되었다. PC엔진에서 슈퍼패미컴으로 오면서 시스템과 그래픽이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드래곤 퀘스트 방식이지만, 전투 그래픽에서 우리 편 모습이 나오거나 파티 4명이 함께 공격하는 일제(一斉) 명령 등 오리지널 요소도 넣었다.

전작보다 나아진 점도 있지만, 그대로인 점도 있었다. 스토리에 개연성이 부족하고 인물에 개성이 없으며 전투에 참여하는 각자의 동기가 설득력이 없다. 8비트 RPG 시절에 있던 불친절함이 여기서도 보인다. 감정이입 하기는 어려운 전개다.

게임은 일본 시코쿠 지방에서 시작해서 전국을 돌고 중반 이후 중국 대륙으로 활약의 장을 넓힌다. 중국에 입국할 때 가진 일본 돈을 중국 돈으로 환전하는 모습은 RPG에서 처음 본다. 중국으로 가면 숙소 명칭도 달라지고 사람들 옷차림도 달라져서 이국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유명한 소림사도 나온다. 일본에서 활약하다 중국으로 가는 RPG는 <천지를 먹다2> 정도가 기억난다.

게임 제목에 벤케이가 들어간 관계로 전작에서 활약했던 실존 인물 벤케이가 부활해서 파티에 합류한다. 벤케이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도 아닌데, 신격화해서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 전작과 마찬가지로 조연이다. 스토리가 전작에서 이어지는 부분이 거의 없는 가운데, 유일한 연결고리.

전작의 시작 지점이었던 사원

끝판왕은 칭기스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5대 황제 쿠빌라이 칸이다. 전작에 이어 역사 속 실존 인물이 보스다.

선소프트가 의욕적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건 느껴졌다. 전작보다 개선된 점이 많고 그래픽과 음악은 슈퍼패미컴 RPG 기준에서 상급이라고 본다. 하지만, 스토리나 연출이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흔한 서양 판타지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국의 역사를 RPG에 녹인 점이다. <천외마경>, <ONI>, <모모타로 전설>, <이인도타도 노부나가>, <가부키 락스> 등 일본에는 자국 세계관을 입힌 RPG가 꽤 있다.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이런 시도는 좋았다고 본다.


엔딩 본 날 - 2022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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