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9

저스트 브리드


에닉스 최후의 패미컴 게임.
1992년 12월 15일에 나왔는데, 이 시기는 슈퍼패미컴이 발매된 지도 2년이 넘어서 패미컴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더구나 슈퍼패미컴의 대작 RPG, 드래곤 퀘스트5(1992년 9월 27일)와 파이널 판타지5(1992년 12월 6일)가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저스트 브리드는 완전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가격은 무슨 배짱으로 매겼는지 코에이 게임급 가격인 9700엔. 9600엔에 나온 드래곤 퀘스트5보다도 비쌌다. 그러니 당시에 누가 이걸 선뜻 샀을까.


시대를 잘못 만났지만, 완성도는 패미컴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진부터 호화롭다. 캐릭터 디자인은 3x3아이즈의 다카타 유조, 음악은 애니 OST 작곡가로 유명한 다나카 코헤이, 프로그램은 모리타 카즈로 등 실력파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패미컴 게임들은 용량 문제로 한자와 가타카나 없이 히라가나로만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게임은 당시로선 대용량인 6메가비트(=약 750킬로바이트) 롬을 써서 글자 크기를 키우고 한자와 가타카나를 넣었다(참고로 드래곤 퀘스트4와 라그랑주 포인트가 4메가비트였다). 덕분에 패미컴 RPG에선 드물게도 가타카나로 주인공 이름을 입력할 수 있고, 메뉴 등에 한자가 섞여 나온다.


처음 실행했을 때, 패미컴 수준을 뛰어넘는 완성도에 놀랐다. 마치 슈퍼패미컴의 상급 RPG를 하는 것 같았다. 패미컴 전성기에 나왔다면 그해 최고 게임 자리에 올랐을 것이고, 길이 남을 명작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늦게 낼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완성도에 견주어 너무 안 알려졌다.


에닉스 게임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드래곤 퀘스트 느낌이 있다. 캐릭터 그래픽과 기본 시스템이 드퀘풍이다. 그런데 전투는 파이어 엠블렘, 샤이닝 포스 같은 턴제 시뮬레이션 방식이다. 그 게임들과 다른 점이라면 적을 공격할 때 별개의 화면이 나오는 게 아니라 필드 위에서 그대로 전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없는 샤이닝 포스라고 해야 하나. 썰렁할 것 같지만, 마법 효과도 표현되고 나름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이런 시스템에선 보통 공격한 뒤 적의 반격을 받는데, 이 게임은 공격할 땐 반격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좀 느긋하게 할 수 있다. 다만, 한 스테이지를 끝내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다. 적을 전멸시키거나 주인공을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하면 전투가 끝난다. 그리고 리더마다 5명씩 부하가 있다. 리더는 자기 부하들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안 되는 제약이 있다. 야외 전투에선 부하들을 조작할 수 있는데, 던전이나 성내 전투엔 리더들만 참여한다.
시뮬레이션 전투이지만, 캐릭터별 상성은 없는 것 같고 그냥 레벨 많이 올려놓는 게 유리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사파이어의 가호로 평화를 유지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 사파이어는 전설 속 성스러운 돌 중 하나이며, 이 돌을 대대로 물려받은 가문의 자손을 사람들은 '사제'라고 부르며 우러러봤다.
1년에 한 번 있는 사파이어 축제의 밤. 그 어느 때보다 축제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새 사제이자 주인공의 연인인 피리스가 첫 번째로 의식을 치르는 날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앞서 주인공과 피리스가 잠시 얘기를 나누던 중, 피리스는 주인공의 눈앞에서 몬스터들에게 납치되고 만다. 마을의 기사인 주인공은 연인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떠난 18세 주인공이 결국 세상을 구한다는, 흔한 왕도물이다. 제목의 뜻도 그런 느낌이다. 후반부 대사에 나오지만, '저스트 브리드(Just Breed)'는 '세상에 정의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란다.
뻔한 이야기라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다른데, 이 게임은 전개가 매끄럽고 연출이 세심하다. 캐릭터의 인간미와 리얼리티가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들었다. 복선도 좋고 캐릭터가 잘 살아 있다. 패미컴 RPG에선 보기 드문 완성도다.


흠을 잡자면, 당시 시대가 그런지 몰라도 내용이 남성 중심으로 전개된다. 납치된 6명의 여성 사제를 구하는 이야기인지라 여성은 그냥 소품 역할에 가깝다. 후반부에 여전사 한 명이 합류하긴 하지만, 비중이 작다. 요즘 여성이 보면 거북해할 만한 부분도 있다. 드래곤 퀘스트의 '파후파후' 비슷한 게 여기서도 나오며, 어떤 노인이 여성 캐릭터에게 날리는 대사는 대놓고 성추행 발언이다. 드래곤볼이나 시티헌터에서 그런 게 자유롭게 묘사되던 시절이니 지금과는 다르다.


진행하면서 워프 마법이 있어서 편했다. 드퀘와 달리 지붕이 있는 장소에서도 워프할 수 있다. 필드 전투에서도 부하 자동 조작이 있어서 편하다. B, C급 RPG에선 이런 부분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데, 저스트 브리드는 세심함이 엿보인다.


패미컴의 황혼을 장식한 RPG답게 마지막 역량을 다 짜내서 마무리한 걸작 RPG라고 생각한다.


엔딩 본 날 - 2018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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