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9

리디아 전기 여명편


<캡틴 츠바사>, <닌자용검전>, <스타포스>, <아르고스의 전사> 등 주로 스포츠와 액션 쪽 게임을 만들던 테크모가 처음 내놓은 RPG다. 1991년 11월에 패미컴으로 나왔는데, 이미 넉 달 전에 슈퍼패미컴으로 <파이널 판타지4>가 나오면서 패미컴은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게다가 <라디아 전기> 발매 일주일 뒤엔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까지 나왔으니 이 게임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제작사 테크모가 RPG 쪽엔 실적이 없던 점도 겹쳐서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이 되고 말았지만, 직접 해보면 평판보다는 괜찮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프닝 데모는 패미컴 수준에선 꽤 인상적이다. <캡틴 츠바사>와 <닌자용검전>의 제작사다운 비주얼신이다.


RPG 형식이지만, 전투는 젤다와 비슷한 칼질 액션이다. 동료들도 전투에 참여하는데,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할 수 있는 건 주인공뿐이다. 동료들에겐 각각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최대 5명이 전투에 참여하는, 당시로선 흔치 않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번거로운 점은 젤다처럼 적들이 필드에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랜덤 인카운트라는 점이다. 필드에선 적이 안 보이다가 갑자기 액션 전투로 바뀌는 식이다. 굳이 이렇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다.


대사창에 현재 지명이 나온다든가 이동 중 동료와 이야기할 수 있다든가 커서를 약 이름에 올리면 효능이 표시된다든가 하는 점은 슈퍼패미컴 RPG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다. 그 전까지 나온 패미컴 RPG보다는 진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비를 벗어야만 다른 장비를 장착할 수 있다든가 보물상자에서 꺼낸 무기가 어떤 캐릭터용인지 장착해봐야만 알 수 있다든가 하는, 세심하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마을의 사건에 관여하면서 진행된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목숨을 걸고 남의 일을 바로 돕는 주인공엔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다른 패미컴 RPG와 마찬가지로 세밀한 심리 묘사까진 안 나오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벤트들은 특색이 없다고 해야 하나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 거쳐야 할 과정이 생략되어서 느닷없는 부분도 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어떤 일을 벌인다면 그 낌새를 먼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걸 플레이어는 몰랐는데, 일을 벌이고 나중에 단 한 마디로 설명하면 감정 이입하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복선이 부족하다.


그리고 뺑뺑이 돌리는 이벤트가 꽤 있다. 같은 곳을 몇 번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지도도 없고 워프 마법도 없고 비공정도 없어서 꽤 피곤하다.
단점만 많이 적었는데, 그나마 특색 있는 점을 꼽자면 후반부에 반전이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왕도물로 끝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란 설정이 이미 반전을 예고한 것이라 딱히 놀라진 않았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엔딩을 보면 다른 세계의 존재가 언급된다. 제목에는 '여명편'으로 적혀 있어서 아마도 속편까지 생각하고 만든 것 같은데, 판매량이 별로였는지 속편이 나오지 못했다. 이게 성공했다면 테크모에서 자사의 RPG 브랜드로 밀었을 것이다.


문제점이 있어서 걸작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시 패미컴 RPG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럭저럭 평작 이상의 점수는 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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