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8

아라비안 나이트 사막의 정령왕


1996년, 판도라박스가 개발하고 장난감 회사 타카라가 발매한 슈퍼패미컴용 RPG.
중세 유럽 판타지 배경이 주류인 JRPG에서 드물게도 아라비아풍 세계를 채택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전개가 바뀌는 점이 특징. 슈퍼패미컴 말기에 나온 작품인지라 인지도는 무척 낮다.


이프리트는 '진'이라고 부르는 정령들의 왕이었지만, 대마법사 슬레이만에게 마력을 봉인 당하고, 1000명의 소원을 들어줘야 해방이 되는 저주에 걸린다.
몇백 년이 흐른 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이모 밑에서 힘들게 자라온 소녀 슈크란은 길가에서 우연히 반지를 줍는다. 그 반지엔 정령왕 이프리트가 봉인 되어 있었고, 이프리트는 반지 주인이 된 슈크란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슈크란은 이프리트가 소원을 들어줘야 할 1000명째 인간이었고, 그것만 해내면, 이프리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착한 슈크란은 남들처럼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세상이 평화로워지게 해달라'는 의외의 소원을 빈다. 결국 이프리트는 내키지 않지만, 슈크란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해 마물들을 소탕하러 나선다.


기본 시스템은 전형적인 턴제 JRPG이지만, 전투에 다양한 결계 카드를 쓸 수 있고, 이벤트를 통해 찾아낸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다. 전투 화면은 쿼터뷰를 채택했고, 단 3명의 파티로 끝까지 진행된다. 주인공 슈크란이 쓰는 '일기'라는 항목엔 이벤트를 진행할 때마다 내용이 추가된다. 일기에 공백이 있으면 아직 할 게 남았다는 얘기.


필드에서 적 조우율은 높은데, 걸음 속도가 느려서 답답하다. 다만, 초중반쯤 나오는 아기 새에게 10000냥어치 아이템을 먹여 키우면, 이동수단으로 쓸 수 있다. 새를 타면, 전투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 워프 마법이나 아이템이 없어서 던전 보스를 물리친 뒤, 나올 땐 좀 불편하다.


중동 배경이라 필드는 사막이 많고, 마을의 여자들은 히잡을 두르고 있다. 중세 유럽 배경 JRPG와 달라 신선하긴 하지만, 비슷한 모습의 마을이 많아서 조금 답답한 감은 있다. 여관에선 불쌍한 이들을 위해 기부를 할 수도 있는데, 50번 하면, 무기를 받을 수 있다.


게임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선 굵은 그림체가 마음에 든다. 주인공 슈크란은 이프리트와 대비되게 순수하고 착하다. 자주 넘어지는 점이 재밌다.


본편 이야기는 아주 짧다. 10시간 아래로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을 몇 개 거치고 적의 아지트 들어가서 끝판왕 잡으면 엔딩이다. '이게 끝이야?' 했다. 그런데, 진엔딩이 따로 있다. 진엔딩을 보려면, 중반 이벤트에서 두 가지 답변이 무척 중요하고, 이프리트의 과거 부하들을 이겨서 모든 마보(魔宝)와 마수정(魔水晶)을 얻어야 한다. 필수 이벤트보다 서브 이벤트가 더 많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RPG라고 할 수 있다.


진엔딩 루트에선 이프리트의 본모습을 볼 수 있고, 최종 던전과 진짜 끝판왕이 나온다. 그리고 일반 엔딩보다 좀더 긴 대사들이 나온다. 개인적으론 일반 엔딩 쪽 결말이 너무 간단하긴 해도 더 여운을 주지 않나 싶다.


스토리, 설정, 캐릭터, 일러스트 다 좋은데, 게임을 너무 짧게 만들었다는 인상이다. 슈퍼패미컴 시대가 끝나려 하는 시기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하고 후다닥 마무리해서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더 일찍 기획해서 볼륨을 키웠더라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요소가 나쁘지 않았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RPG.


엔딩 본 날 - 2020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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