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6

대패수 이야기 1


1994년 12월, 허드슨이 슈퍼패미컴용으로 발매한 RPG다. 패미컴용 전작 <패수 이야기>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는다곤 하는데, 전작의 일부 캐릭터와 보스, 칼, 오라 구슬이 재등장한다.


스토리는 2010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에서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이세계물이다. 여러 종족이 평화롭게 사는 환대륙 쉘도라도에 마왕 팻배저의 부활을 알리는 쓰나미가 닥치고, 위기를 직감한 패수(貝獣) 마을의 선인은 쉘도라도를 구하기 위해 지구로부터 불의 조개 용사를 소환한다. 소환된 지구(아라비아풍 복장으로 봐서 중동) 소년은 처음엔 당황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마왕을 물리치는 것밖에 없음을 깨닫고 세 조개 용사(바부, 포욘, 쿠피쿠피)와 뭉쳐 마왕 토벌에 나선다.


주인공은 <드래곤 퀘스트> 주인공처럼 예, 아니오 이외에 말은 하지 않는다. 쉘도라도를 구할 전설의 용사를 '불의 조개 용사'라고 하는데, 허드슨의 또 다른 RPG <천외마경>에서도 '불의 일족'이 전설의 용사였다. 일장기의 붉은 원, 히노마루(日の丸)의 '히'가 일본어로 불(火)을 뜻하기도 하므로, 아마도 거기서 가져온 일본 코드가 아닌가 싶다.


전형적인 드퀘식 JRPG이지만,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도우미(すけっと) 시스템이 있어서 필요할 때 도우미 캐릭터를 불러내면 장애물을 치워주거나 아이템을 발견하는 등 진행에 도움을 준다. 또, 얻을 수 있는 동료가 다양하고 그들과 관련된 이벤트가 숨어 있어 찾는 재미가 있다. 동료는 3명까지 데리고 다닐 수 있고 마음대로 편성이 가능하다. 닌자 동료도 나오는데, <파이널 판타지6>의 쉐도우가 생각난다. 이 게임은 드퀘와 파판에서 일부 요소를 가져오면서 허드슨 색을 입혔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동료 바부, 포욘, 쿠피쿠피, 전작에도 등장한 이 세 조개 용사는 귀여워서 인기가 있었는지 게임보이의 다른 작품에도 출연한다. 특히 포욘은 모든 대사에서 식탐을 드러내서 재미있다. 포욘을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게임이 게임보이용으로 나와 있다. 다만, 본편인 이 게임에서 비중이 클 줄 알았는데, 그냥 동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조개 용사들을 파티에 넣든 안 넣든 시나리오 진행과는 상관이 없었다.


오래된 RPG인 점을 고려하면 디테일은 좋은 편이다. 데리고 다니는 동료에 따라 이벤트 대사가 달라지고, 사건 해결 후 마을에 자잘한 변화가 있는 등, 공들인 느낌이 난다. 파고들 요소도 많다. 플레이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땅이 있어서 돈만 많으면 집, 온천, 공원 술집 등을 지어서 마을로 꾸밀 수 있다. 이밖에도 게임 클리어하는 데는 상관 없지만, 겸사겸사 즐길 수 있는 숨겨진 아이템, 서브이벤트가 있다.


시스템도 편리한 편이다. 초반부터 워프 아이템을 쓸 수 있어서 한 번 들른 마을은 워프로 언제든 갈 수 있고, 던전 탈출도 아이템으로 가능하다. 마을에선 B 버튼 누르고 있으면 빨리 걸을 수 있다. 다만, 어디 들어갈 때 롬팩 게임답지 않게 로딩이 살짝 있다는 점이 거슬린다.


가면족이라는 종족이 나오는데, 외모에 대한 편견 없이 동족을 대하기 위해 평생 가면을 쓰고 산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귀여운 그래픽과 코믹한 분위기의 무난한 왕도 RPG 같지만, 마왕 팻배저 뒤에 더 강력한 적이 있음을 알게 되는 후반부엔 하드한 SF로 전개된다. 곤충에서 진화한 외계인이 별을 침략하며 다니고, 별의 생물들을 잡아다 자신들의 영양분으로 삼는다. 영화 <에이리언>이 생각나는 장면이 바이오베이스 던전에서 나오는데, 가정용 게임기에선 보기 드문 잔혹한 장면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게이머 사이에선 '트라우마 게임', '우울 전개 게임'으로 <대패수 이야기>가 꼽힌다고 한다. 한 캐릭터의 정체도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요즘 같으면, 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추행으로 보이는 장면도 있다. 여자 엉덩이를 만진다든가 노골적으로 여자 몸을 품평한다든가 애들 게임에 대놓고 이런 게 나오던 시절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소재는 오라 구슬이다. 앞선 문명을 이룩할 수 있고, 막강한 병기도 될 수 있는 오라 구슬 때문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크리스탈과 비슷하다.


전체적인 평을 내리자면, 슈퍼패미컴 RPG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완성도와 디테일이 높은 수준이었으며, 후반부 의외의 전개는 취향에 맞았다.



엔딩 본 날
2020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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