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1

이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 새턴판

칸노 히로유키가 시나리오를 쓴 <디자이어>, <이브 버스트 에러>를 감명 깊게 했기에 그의 또 다른 작품 <유노>도 꼭 하고 싶었다. 하지만 PC9801 에뮬로 프롤로그까지만 하고 방치한 지가 15년 되었나.
2018년 10월 문득, 컴퓨터하드의 파일 정리하다가 유노가 보여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PC9801판을 지금 다시 하긴 불편할 것 같아 윈도우판으로 하려고 했는데, 윈도우10에서 실행이 잘 안 되어서 포기하고 새턴판으로 시작했다. 2018년판 리메이크판도 있지만, 바뀐 그림체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새턴판은 PC9801의 수위 높은 장면들이 삭제되긴 했지만, 음성도 있고, 추가된 그림과 요소도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마우스 대신 게임패드로 조작할 수 있었다.


에뮬은 PC용 레트로아크에서 mednafen_saturn 코어로 돌렸다. 놀랄 정도로 잘 돌아갔다. 새턴 에뮬은 플스 에뮬에 비해 완성도나 기능이 떨어져서 안 하고 있었는데, 레트로아크는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안드로이드용 레트로아크에선 스펙상 너무 버벅거려서 플레이가 힘들다.
유노는 CD 3장짜리 게임이었는데, 플레이 중 디스크를 바꿔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맸다. 레트로아크에 디스크 컨트롤이란 메뉴가 있길래 써봤더니 바뀐 CD를 인식 못 했다. 구글 검색으로 방법을 찾았다. 장수 많은 새턴 게임하다 또 헤맬지 모르니 방법을 기록해둔다.


예를 들어 CD1으로 플레이하다 CD2로 바꾸라는 화면 나올 때, 강제세이브한 뒤, 강제세이브한 파일을 CD2용으로 이름을 바꿔주고, CD2를 레트로아크에서 실행하고, 강제세이브 파일을 로드한다. 거기서 레트로아크의 디스크 컨트롤 메뉴를 불러내서 '디스크 사이클 트레이 상태' 메뉴로 디스크를 꺼냈다 넣으면 CD2로 다시 부팅되어 게임을 이어서 할 수 있다.


유노 같은 비주얼 노벨 장르는 그림과 음성 그리고 독자의 선택권이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반사신경도 필요 없고 버튼만 누를 줄 알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난 일본 RPG를 할 때, 레벨업 과정이 너무 지리멸렬해서 치트를 곧잘 쓰는데, 이 장르는 치트를 쓸 필요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아서 그냥 정상적으로 즐긴다.


다만 이 유노는 텍스트양이 방대하고 분기가 너무 많아서 공략을 안 보고 하면 클리어에 100시간도 더 걸릴 것 같아서 처음부터 공략을 보고 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깨는 데 하루 몇 시간씩 해서 일주일은 쓴 것 같다. 이렇게 문장이 많고 내용이 긴 비주얼 노벨은 처음 본다.


유노는 고등학생 주인공 아리마 타쿠야가 실종된 아버지로부터 병렬세계를 왕래할 수 있는 장치를 받은 뒤, 자신을 둘러싼 묘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험하는 이야기다.
병렬세계 왕래라는 건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건데,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원하는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다만, 타임머신과는 다른 점이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그건 과거가 아니라 병렬세계라는 점. 그곳에서 무언가를 바꾼다고 미래가 바뀌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인과관계가 생긴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무수히 존재할 수 있다.


이 게임은 평행우주 학설을 집어넣어서 외계어 같은 용어가 몇몇 장면에서 난무한다. 공부를 따로 하지 않는 한, 이해가 어려운데, 모르고 넘어가도 전체 스토리 이해에는 큰 문제가 없다.


처음에는 텍스트가 많아서 인내심이 필요했는데, 스토리가 흥미진진해서 며칠 동안 몰두해서 했다. 유노는 1996년 PC9801로 나온 이래, 1997년 세가 새턴, 2000년 윈도우 PC, 2018년 PS4, PS Vita로 이식되어 발매되었다. 2019년엔 TV애니로도 나온다고 한다. 세월이 꽤 흘렀는데도 왜 이렇게 리메이크가 여러 차례 되고 칭송받는지 게임을 해보고 알 수 있었다. 버튼만 누르면 끝날 것 같은 비주얼 노벨 장르에 이 정도의 게임성과 시나리오를 갖춘 작품은 드물다.


남성을 위한 엘프사 게임답게 노출 장면이 난무한다. 여성을 향한 주인공의 농담과 행위는 명백한 성희롱, 성추행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이렇게 했다간 인생 종친다. 게임 속에서만 즐기자.
2018년 리메이크판은 한글화되었는데, 심의 통과는 문제없었는지 모르겠다. 유두, 성기 노출을 자제한 새턴판으로 했는데도 가정용 게임기로선 꽤 야한 편이었고, 근친상간으로 추정되는 장면도 있다. PC9801판이 나왔을 때 일본의 창작 환경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임은 꽤 어렵다. 분기가 많아서 다 보려면 퀵세이브 시점이 무척 중요하고, 특히 미로 끝에서 노트북으로 수수께끼 풀어야 하는데, 너무 어렵다. 공략 없이 이 게임을 깬다면, 성취감이 대단할 것 같다. 마지막 이세계편으로 가려면 주인공 주변의 모든 여성을 다 공략해야만 한다. 한 여자를 향한 일편단심 사랑 따윈 엘프사 게임에 가당치않다.
이세계편은 분기 없이 일직선 진행이라 편했지만, 예상보다 내용이 길어서 엔딩까지 하루를 썼다. 다소 느릿느릿한 진행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감정이입을 위해선 필요했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끝을 보고 나니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세레스는 어떻게 그 자리에서 처음 등장할 수 있었는지? 또, 모 캐릭터는 정황상 주인공의 딸이 아닌가 싶은데, 게임에선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딸이 맞다면 근친상간이 된다. 그리고, 세상을 파멸로 몰 뻔했던 악당의 정체는 밝혀지지만, 그가 왜 그랬어야 했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없다.
개인적으론 엔딩이 깔끔하진 않았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와서 모든 등장인물이 평화롭게 사는 걸 기대했는데, 마무리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야게임이지만, 야한 장면을 다 드러낸다고 해도 작품성을 인정받을 만큼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엔딩까지 간 새턴 게임이다.


엔딩 본 날 - 2018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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