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9

라그랑주 포인트


요즘 패미컴 RPG들이 당긴다. 고전 게임은 할 마음이 드는 순간 해야지 그때를 놓치면 영영 못 할 수도 있다. 이번엔 10년 이상 미루기만 했던 라그랑주 포인트다.
1990년 슈퍼패미컴이 발매된 이후, 패미컴은 황혼기를 맞았다. 라그랑주 포인트는 그러한 시기에 나온 RPG다. 말기 작품답게 패미컴 최고 수준의 그래픽과 음악을 자랑한다. 특히 음악은 코나미의 전용 음원 칩 VRCVII를 롬팩에 탑재하여 패미컴의 스펙을 뛰어넘는 FM음원을 들려준다.


첫인상은 슈퍼패미컴의 웬만한 초기 RPG보다 나아 보였다. 색상수는 패미컴의 한계가 명백하지만, 그 한계 안에서 최대치를 뽑아낸 느낌이었다. 캐릭터도 큼지막해서 시원시원하다. 다만 게임을 해보니 비슷한 배경과 건물 디자인이 반복되어 스케일이 작게 느껴진다.
당시 RPG로서는 드문 SF 세계관이다. 라그랑주 포인트(Lagrangian point)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라그랑주가 위성에 관해 연구하다 발견한 지점이라고 한다. 공전하는 행성과 행성 사이에 중력이 0이 되는 안정적인 지점이며 이곳에 물체가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건담 시리즈를 보면 이 라그랑주 포인트에 코로니를 만들고 다른 행성에서 자원을 캐내 도시를 건설한다. 이 게임도 그 코로니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구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22세기 인류는 지구에서 떨어진 라그랑주 포인트에 이시스 성단이라는 스페이스 코로니를 건설한다. 인간이 이곳에 정착한 지 24년 뒤, 랜드2에 바이오해저드(생물재해)가 발생한다. 원인 규명을 위해 파견된 조사대들은 차례로 연락이 끊긴다. 주인공 진은 추가로 파견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이 사건의 배후를 찾아내야 한다.
바이오해저드라고 하니 캡콤의 좀비 게임이 생각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바이오해저드는 유전자 조작으로 괴물 같은 몸을 갖게 된 인간과 동물의 공격을 말한다. 그들은 코로니 거주민을 말살한 뒤, 지구까지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밝은 분위기의 캐릭터 디자인과 달리 라그랑주 포인트의 세계관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코로니를 건설한 이유가 환경 오염으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지구를 대체하기 위해서였고, 그 때문에 어떤 과학자는 미친 계획을 짠다. 오염된 지구의 환경에서도 살 수 있도록 유전공학의 힘으로 인간의 육체를 변형하자는 것이다. 이래서 비극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고 알기 쉽게 진행된다. 바이오 군단을 섬멸하는 것이 다다. 특별한 반전도 없다. 패미컴 RPG들이 대부분 불친절한 편이라 어쩔 수 없지만, 이야기에 살을 더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요즘 RPG 같으면 바이오 군단을 택한 이들의 심정이나 과거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을까 싶다.


패미컴 게임에선 흔치 않은데, 중간에 어린애가 죽는 장면이 클로즈업해서 나온다. 어린 시절 이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일본인도 있단다.

길 찾기는 어려운 편이다. 지도가 있긴 하지만, 지형 때문에 빙 돌아가야 하는 구간이 있고, 랜덤 인카운터율이 극악이라서 끈기가 필요하다. 랜덤 인카운터를 없애는 치트가 있긴 한데, 필드에선 안 통하는 반쪽짜리다. 성가신 점은 이벤트를 클리어하고 나서 그곳을 바로 탈출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깨고 나서도 같은 길을 걸어나와야 한다. 마을 간의 이동도 중반 이후 워프 아이템을 얻기까지는 일일이 걸어 다녀야 한다. 인카운터율이 높으니 더 고생한다.


SF RPG인데도 중세 판타지처럼 동굴을 등장시키는 게임이 많은데, 이 게임은 그건 없다. 던전이 다 환한 건물 내부다. 미로는 그리 어렵지 않다.

본편의 진행과 상관없는 이벤트가 꽤 있다. 안 깨도 엔딩 보는 데는 문제 없지만,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난 반쯤 했다.


비교적 화려한 오프닝과 달리 엔딩은 소박한 편이다. 높은 인카운터율과 이야기에 살이 덜 붙은 느낌 때문에 걸작으로까지 꼽을 순 없지만, 높은 수준의 그래픽과 음악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엔딩 본 날 - 2018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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