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6

로맨싱 사가 1

로맨싱 사가 1편은 1992년 발매되었을 때, 그 전의 JRPG들과는 차별되는 요소로 주목을 받았다. 초반 스토리가 각각 다른 8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었고, 무엇보다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으로 자유도를 높였다.
90년대 초반까지 나온 JRPG들은 드래곤 퀘스트 방식을 교과서처럼 따르는 경우가 흔했는데, 불만이라고 한다면, 전개가 일방통행식이라 정해진 순서대로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로맨싱 사가는 그 점을 보완했다. 각 지역에 널려 있는 퀘스트 중에서 게이머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즐길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같은 게임을 즐겨도 게이머마다 시나리오 순서는 다 달랐다. 요즘 오픈RPG에선 흔한 방식이지만, 당시 일본의 RPG에선 드문 시도였다.

난 이것이 진정한 RPG라고 생각했다. 판타지 세상을 내 맘대로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의뢰를 받는다는 데 해방감을 맛봤다.
하지만, 당시 일본어가 미숙했던 나에게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은 진행하기 어려웠다. 시나리오 순서가 정해진 드퀘식 RPG야 공략 보고 따라 하면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지만, 이건 내가 진행하는 퀘스트가 뭔지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임챔프 같은 잡지에서 분석을 내주긴 했지만, 너무 부실해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전투만 반복하다가 결국 접었다. 그래도 오프닝 음악이 명곡이라 내겐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훗날 PS2 리메이크판인 민스트럴송으로 엔딩을 봤지만, 어릴 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게임 같았다. 아쉬워서 25년 넘게 지난 지금 에뮬로 다시 돌려봤다.

다시 해본 로사1은 너무나 불편했다. 일단 걷는 속도가 거북이인데, 적들이 빠르게 몰려드니 전투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무늬만 심볼 인카운터이지 랜덤 인카운터 수준의 전투 횟수를 피할 수 없었다. 엔딩까지 가는 데 일정 수준의 전투 횟수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제적인 전투를 부추겼다.
전투를 몇백 번은 되풀이해야 하는데, 전투 후 능력치가 오를 때 나오는 각 캐릭터의 동작은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어릴 땐 근사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플레이 시간을 어거지로 늘리는 것 같았다.

그 외에 장비를 해봐야만 무구의 수치를 알 수 있다든가, 던전 탈출 마법이 없다든가, 중요 대사도 평범하게 처리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옛날 RPG이니까 넘어가겠다.

이 게임이 막히기 쉬운 건, 지금 내가 받은 퀘스트가 뭔지 표시가 없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 힌트가 적기 때문이다. 요즘 RPG야 퀘스트 목록이 쭉 나열되고 가는 길도 친절히 알려주니 헤맬 일이 적은데, 이건 그런 게 없어서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퀘스트 진행 중에 중단했다가 며칠 뒤에 하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이 게임을 지금 한다면, 공략과 치트가 필수다. 내 경우는 4배로 빨리 걷는 치트, 전원을 앞 열로 보내는 치트, 적들을 일격에 죽이는 치트에다 에뮬의 빨리 넘기기 기능까지 썼다. 그래도 전투가 워낙 잦아서 던전 들어갈 때마다 부담이 됐다.

대사의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 캐릭터의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출신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대사를 종종 내뱉으며, 개연성 없는 대사도 많다. 그리고 퀘스트를 깨면, 감사의 말이 성의 없어서 성취감이 잘 안 든다. “따님을 구해왔습니다” 하고 가면, “아, 그래. 이게 보상이다. 그럼, 잘 가” 하는 느낌?

슈퍼패미컴 최고의 RPG 회사인 스퀘어 작품이라 당시 이 게임의 평이 좋은 줄만 알았다.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고 한다. 다시 해보니 단점이 많이 보여서 그럴만하다고 수긍했다.

이 게임은 일본인 능력자가 만든 확장 패치가 있다. 끝판왕의 동생인 세라하(셰릴), 데스를 주인공으로 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셰릴 패치’가 있길래 그걸 적용해서 했다. 셰릴이나 데스를 선택하고 특정 조건을 채우면, 끝판왕이 바뀐다고 한다.
하지만, 중반까지 진행하다가 불편한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고 전투 횟수를 치트로 960회 이상으로 올려서 끝판왕에게 바로 갔다.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개조된 내용이 아닌 오리지널 엔딩이 나왔다.

로맨싱 사가의 초기작은 조잡한 부분이 많은 B급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편에서 안주보단 도전을 선택했기에 2편, 3편 같은 명작이 나온 것이다. 시스템적으로 JRPG 역사에 남을만한 게임이라고 본다.

지금 즐긴다면, 슈퍼패미컴판 원작보다는 리메이크판 민스트럴송을 권한다.


엔딩 본 날 - 2022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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