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1

패미컴 디자인의 에뮬 게임기 만들기

제 인생에서 게임을 최고로 재미있게 즐겼던 때를 꼽으라면 전 주저 없이 패미컴 전성기를 떠올립니다. 그 촌스러운 디자인의 게임기에서 어찌나 재밌는 게임이 많던지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지요. 그 추억이 떠올라 패미컴을 다시 들이고 싶어졌습니다. 다만, 사서 모셔두기만 하는 건 제 성향과 맞지 않아서 패미컴 껍데기만 싸게 구한 뒤, 내부를 개조해서 에뮬 기기로 쓰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패미컴 껍데기를 구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으나 제 결론은...

1. 오리지널 정크 패미컴 → 외관 상태 좋은 걸 싸게 구하기 쉽지 않다. 대부분 더럽고 황변. 그리고 개조를 위해 귀한 오리지널 부품을 훼손하는 건 뭔가 죄짓는 기분이 든다.

2. 패미컴 미니 → 크기가 오리지널보다 작은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롬팩을 꼽지 못해서 탈락. 롬팩이 꼽히지 않은 상태로 게임이 돌아가는 걸 보면, 이건 패미컴이 아니란 느낌이 든다. 장식용이라도 메가드라이브 미니처럼 모조 롬팩이 있었으면 했다. 가격도 싸지 않다.

3. 중국산 짝퉁 패미컴 호환기 → 리뷰를 통해 외관을 미리 살펴봤는데, 오리지널과 거의 비슷했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14달러, 당근에서 중고 15,000원 정도에 팔고 있었다. 싸고 짝퉁이니까 내부 부품을 훼손해도 부담이 전혀 없겠다.

그래서 3번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짝퉁 패미컴 FC COMPACT Ⅱ를 받고 롬팩 끼워서 한 번 돌려본 뒤, 분해했습니다. 본체 밑면의 나사 6개 돌리면 간단히 분해됩니다.

싸구려답게 내부 구조는 아~주 소박하네요. 부품을 떼어내도 별로 아깝지 않겠습니다. 이 안에 새로 넣을 메인 부품은 안드로이드 스틱입니다.

AMLogic S805 CPU를 채용한 옛날 제품이죠. 한때 제 TV에서 Kodi로 여러 동영상을 보여줬던 놈인데, 지금은 더 좋은 스마트 기기에 밀려서 서랍장에서 잠자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3만 원 주고 샀으니 지금은 더 헐값이거나 같은 값에 더 좋은 스틱 제품이 널려 있겠죠. 그래도 패미컴 게임 돌리는 데는 차고 넘치는 성능입니다.

일단 짝퉁 패미컴의 내부 부품을 다 들어냈습니다. 나사만 돌리면 되니 여기까진 하나도 어려운 게 없었습니다. 제 계획은 1) 안에 S805 스틱을 고정. 2) 전면의 게임 패드 포트 2개를 USB 포트로 교체. 3) 패미컴 위의 버튼과 롬팩 꼽는 곳은 그대로 살리는 겁니다.

S805 스틱은 케이스가 장착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분해해서 꺼내뒀습니다. Micro SD 카드 삽입구 1개, 미니 USB 포트 2개, 일반 USB 포트 1개가 달려 있습니다. 미니 USB 하나는 전원용으로 쓰고 나머지 두 개는 게임 컨트롤러나 외장 디스크 장착용으로 씁니다. 기기에 리셋 버튼이 있는데, 펌웨어 설치할 때 필요합니다.

납땜 작업 없이 USB 케이블만으로 연결이 되게끔 이리저리 자리를 맞춰봅니다. S805 스틱과 연결될 USB 연장 케이블이 전면 게임 컨트롤러 9핀 포트가 있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길이가 맞는 USB 연장선 고르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내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부품은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다 자르고 가공합니다. AV 단자는 필요 없으니 버리고 롬팩 삽입용 부품과 버튼 부분만 가공해서 남깁니다.

롬팩 삽입용 부품 아래에 S805 스틱과 걸릴 것이라 예상되는 부분은 뜯어버렸습니다. 부품 재질이 튼튼하지 않아서 살살 뜯어야 합니다.

두 개의 9핀 포트도 USB 포트를 달기 위해 니퍼로 투박하게 잘랐습니다. 이 작업이 고되네요. 원래 맞는 부품이 아닌 걸 끼우려다 보니 손이 갑니다. 결과물은 간단해 보이는데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거죠.

패미컴 케이스 뒤쪽으로 HDMI 포트와 USB 전원 연결선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HDMI 젠더를 샀습니다. 이걸 순간접착제로 본체 내부 뒤쪽에 높이를 맞춰 고정한 뒤, S805 스틱을 꼽았습니다.

뒷면 AV 포트 구멍 부분은 HDMI 포트와 크기가 안 맞기 때문에 사이를 잘라서 구멍을 넓혀줬습니다. 미니 USB 전원 부분은 가지고 있던 부품이 딱 맞게 들어가네요.

자리 잡은 모습. 간단한 것 같지만, 이렇게 자리 잡기까지 궁리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전면의 USB 포트 두 개는 게임 컨트롤러 9핀 포트 뜯어낸 자리에 순간접착제로 붙였습니다. 뒷면도 HDMI 포트와 USB 전원 연결 포트를 붙여서 고정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도록 틈에는 글루건을 쏴줘서 접착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위에다 롬팩 삽입용 부품을 나사로 끼우면, S805 스틱을 흔들리지 않게 눌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구조가 단순하죠? 딱 맞는 USB 케이블들을 제가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HDMI 젠더 말고는 전부 서랍에 처박혀 있던 것들입니다. 이 안드로이드 스틱엔 이 배치가 딱 맞네요. 만일 패미컴 미니 정도의 크기였다면, 좁아서 넣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케이스를 닫기 전에 S805 스틱에 적절한 OS를 깔아야 합니다. 처음엔 기존 안드로이드 OS에 개별 에뮬을 깔아서 돌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S805 스틱은 킷캣까지밖에 지원을 하지 않아서 안 깔리는 앱도 많고 게임 컨트롤러 호환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끼워도 작동 안 되는 USB 컨트롤러가 많네요. 제가 가진 것 중엔 2.4g 무선 아이페가 컨트롤러만 작동했습니다. 이걸 해결하려면 모듈을 깔아야 하는데, 안드로이드는 꽤 성가십니다. 게다가 안드로이드용 레트로아크에서 패미컴 게임을 돌려보니 코어에 따라 동작이 무거운 게 느껴지네요. NES.emu에선 쾌적했구요.

어차피 게임용으로만 쓸 것이니 안드로이드는 포기하고 레트로아크 기반 OS인 Lakka를 깔기로 했습니다. S805 기기의 경우는 2.3.1 버전이 마지막 버전이네요. 후속 기기인 S905는 3.0 이후 버전도 설치됩니다. 낮은 버전의 아쉬운 점이라면 코어가 구 버전이라는 정도. Lakka에서 패미컴 게임 돌리는 데는 별 차이 못 느낍니다.

4기가 Micro SD 카드에 Lakka를 입힌 뒤, S805에 끼우고 S805의 리셋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전원을 켜면 Lakka가 부팅됩니다. 안드로이드보다 부팅이 빠르고 쾌적하네요. Micro SD 카드엔 패미컴의 일본판&비공식 한글판 게임 롬을 1000개 넘게 넣어뒀습니다. 이 게임들의 썸네일을 넣는 리스트 작업도 재밌네요. 배경 이미지는 패미컴 느낌 나는 걸 골랐습니다.
패미컴 게임을 돌려봤는데, 안드로이드에서 돌릴 때보다 가볍습니다. 무엇보다 게임 컨트롤러를 가리지 않아서 꼽으면 바로 작동됩니다.

안드로이드 킷캣에서 인식 못 하던 듀얼쇼크2+USB컨버터가 잘 되네요. 임시로 쓰다가 추후 패미컴 디자인의 패드를 구해서 연결할 생각입니다. USB 외장 드라이브들도 잘 인식합니다.

조립하고 완성. 이제 동작은 안 하지만, 롬팩과 게임 패드 두개를 끼워줍니다. 이래야 패미컴 같죠. 전원&리셋 버튼 역시 눌러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기의 전원을 TV의 USB 포트에 연결하면, TV를 켤 때 패미컴이 자동으로 켜지고, TV를 끄면 패미컴도 꺼집니다. 전원 버튼이 굳이 필요없단 얘기죠.

이걸로 패미컴 게임 하면 그 시절 느낌 나겠네요. 장식용에 그치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니 패미컴 게임 엔딩 많이 봐야겠습니다.

레트로플래그에서 나온 슈퍼패미컴, 메가드라이브 케이스처럼 일본판 패미컴 케이스도 나왔다면, 편하게 그걸 선택했을 겁니다. 없어서 이렇게 만들었는데, 만족스럽습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건 롬팩 쪽에 USB 리더기를 내장해서 SD 카드를 뺐다 끼웠다 할 수 있게 한다든가, 무선 패미컴 디자인 패드를 사서 기존 유선과 교체한다든가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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