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17

MSX와 나

초등학교 시절, 대우에서 나온 MSX1기종인 8비트 컴퓨터 아이큐1000을 1년동안 끈덕지게 어머니를 졸라서 중고로 간신히 구입하였다. 중고가 10만원이었는데, 당시로서는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비싼 가격으로 기억된다.


아이큐1000은 키면 바로 베이직 입력 상태가 되는데, 부팅시간이 4~5초로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나중에 같은 8비트 컴퓨터인 애플를 만져봤을 땐 왜 부팅을 하는데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이 애플을 느리고 불편한 컴퓨터로 계속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게다가 컬러TV를 그대로 연결할 수 있는 MSX에 비해 애플은 흑백모니터가 대세였기 때문에, 더더욱 초라하게만 보였다.

사실 요즘에 쓰는 PC도 부팅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불만이다.

아이큐1000은 보조기억장치로 카셋트테이프레코더를 썼는데, 일반 테이프에다
자료를 저장하는, 대단히 뒤떨어진 방식이었다.


테이프로 게임을 하려면 최소 5분은 기다려야 했고, 대용량(?)의 게임을 실행시키려면 무려 20분이나 걸렸다.
그것도, 테이프가 늘어나거나 레코더의 헤드 상태가 안 좋으면 에러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또한 테이프에 저장된 자료들은 금방 깨지거나 유실되는 경우가 많아서 날려 먹은 자료들도 허다했다.

물론 MSX용 3.5인치 플로피디스크 장치도 팔기는 했는데, 당시 가격이 40만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같으면 있어도 쓰지 않는 플로피디스크가 그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주로 테이프를 썼는데, 그때는 일반 서점에서 저용량 게임 몇 종류가 들어있는 테이프를 5000원에 팔고 있었다.

나중에 이른바 '메가게임'이라는 고용량 게임들(꿈의 대륙, 그라디우스, 람보 등)이 나왔고, 이걸 테이프로 하려면, 램용량을 늘려주는 확장롬팩을 끼워야만 했다.


게임은 역시 에러 많은 테이프보다는 롬팩으로 하는 게 빠르고 간편했다. 문제는 메가게임의 롬팩 가격이 25000원 이상 되는 고가였기 때문에, 어렸던 나는 1년동안 용돈을 모아야 간신히 하나 살 수 있었다.

그때 산 팩이 마성전설2이었고, 제작사는 다름아닌 코나미였다.


난이도가 어려워서 엔딩을 보진 못했지만, 내가 가진 유일한 팩이었기 때문에, 애착을 가지고 수십 번 도전하였다.
그때는 세이브/로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다가 죽으면,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초반부만 계속 반복플레이했다. 패스워드로 그만둔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알았다면, 엔딩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마성전설2의 배경음악은 지금 들어도 상당히 괜찮고, 게임성도 상당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아이큐1000으로 주로 한 것은 게임이었지만, 컴퓨터학원에서 베이직 언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베이직 언어를 배운 것도 사실은 게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책 짠 프로그램은 숫자맞히기 게임 같은 간단한 것이었다.
사실 베이직 언어는 느려터지고, 명령어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성전설' 같은 게임을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중에는 베이직 게임의 코드가 실려 있는 책을 사서 며칠동안 입력한 뒤, 테이프에 저장해서 게임을 즐기곤 했다.

물론, 그 게임들의 수준은 판매되는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치했지만,
힘들게 쳐서 실행하는 게임이라 애착은 남달랐다.

얼마 뒤에 대우에서 MSX2급인 아이큐2000이 나왔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큐1000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대단히 갖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살 순 없었고, 컴퓨터 학원에서 두들겨 보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MSX2가 나오자, MSX1용으로 발매되는 게임이 점점 줄어들고, 디스크드라이브전용 게임도 많아져, 아이큐1000은 나에게서 외면받기 시작했고, 만지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결국 몇 년 뒤, 나의 첫번 째 컴이었던 아이큐1000은 먼지를 먹은 채, 이사할 때 버려지게 되었고, 나중에 패미콤을 살 때까지 게임과도 잠시 작별하게 되었다.

댓글 4개:

  1.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하는군요. 마성전설 세이브/로드 개념을 몰라서 처음부터 계속 하셨단 글에, 저 또한 어릴 때 그런 경험이 있어 미소가 지어졌네요. 큽~ 여튼,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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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SX라는 물건이 참... 어떻게 보면 애증의 대상입니다. MSX라는 것이 없었으면, 세상을 좀 정상적(?)으로 살아왔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반대로 없었으면... 유년, 청소년기때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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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렇지요. 만약 MSX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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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당시에 대부분 팩으로 된 게임을 했는데 알파로이드의 경우는 카세트를 읽어서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웠던 시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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