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3

G.O.D 눈을 뜨라는 소리가 들려


1996년 12월 20일, 인피니티 다이스가 개발하고, 이매지니어가 발매한 슈퍼패미컴용 RPG. 호화 제작진을 내세워 1995년에 발매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1년 넘게 연기를 거듭하다가 슈퍼패미컴이 차세대 기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겨우 나왔다. 게다가 발매 뒤 얼마 안 되어서 플레이스테이션1으로 리메이크한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판매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플스로 리메이크판이 있는 줄 알았다면, 슈퍼패미컴판으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난 몰라서 슈퍼패미컴판으로 깼다.


제목인 G.O.D는 Growth Or Devolution(진화 또는 퇴화)의 약자라고 하는데, 끝판왕이 신(GOD)인 걸 보면, 중의적인 뜻이 있지 않나 싶다. 제작진은 일본 기준으로 화려한 편이다. 제작 총지휘와 각본에 작가(일본극작가협회회장) 코가미 쇼지, 캐릭터 디자인에 만화가 에가와 타츠야, 음악 감독에 데몬 각하를 기용했다.


스토리는 닌텐도의 <마더>처럼 현대물로 시작한다. 1999년 일본에서 사는 8살 소년은 여름방학을 맞아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홋카이도 친척집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소년은 여행 도중 츠쿠바네 산에서 유령이 나온단 얘기를 듣게 되고, 호기심에 산으로 향했던 소년은 거기서 지구가 에일리언에게 침공당하는 광경을 보고 정신을 잃는다.


10년 후인 2009년, 에일리언 때문에 괴멸 직전인 인류는 세계 각지에 '브레스'라는 외계인 대항 조직을 만들어서 싸우고 있다. 10년 전 산에서 정신을 잃었던 소년은 이제 브레스 대원이 되어 외계인들 소탕에 나선다.


주인공은 초능력자이며, 각지에 있는 신의 돌과 접촉하면, 사용되지 않는 인간의 나머지 뇌가 각성하여 능력이 더 강해진다는 설정이다. 주인공과 같은 초능력자들을 동료로 삼아서 외계인과 대항하는 SF물이다. 초능력(사이코)은 판타지물의 마법과 같은 역할이다.


전투는 전형적인 고전 JRPG 방식이며, '힘', '기' 등의 속성별로 챠크라라는 기술을 쓸 수 있다(안 써도 레벨만 올리면 클리어 가능). 무기가 바뀌었을 땐 전투 애니메이션에 반영된다. 아쉬운 점은 게임의 반응 속도가 다소 굼뜨다는 것이다. 어디 들어오고 나갈 때, 전투 화면과 필드 화면이 전환 될 때, 상태 창이나 지도 창을 열 때, 살짝 느려서 답답한 느낌을 준다.


현대가 배경이라 전 세계를 무대로 한다. 일본에서 시작해서 러시아, 캄보디아, 스리랑카, 중국, 프랑스, 잉글랜드, 미국, 이집트, 오세아니아, 남미까지 모험한다. 그 나라 사람의 특성(?)도 일부 표현된다. 가령 영국과 프랑스의 앙숙 관계상 런던 사람과 파리 사람이 "촌스럽다", "잘난 척한다"고 서로 뒷담화를 깐다든가 모스크바 사람은 사사건건 돈을 요구한다든가.


런던과 파리는 에일리언 침공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사람들이 다 지하에서 살고 있고, 뉴욕은 슬럼가가 되어 있다. 설정 자체가 어두워서 게임 내용도 암울할 것 같은데, 전반적으론 개그 요소가 있다. 주인공이 어떤 집에 들어갔더니 할아버지가 도둑놈이라고 하자, 주인공이 다른 게임과 다르다고 한다. 그야 다른 RPG는 막 들어가서 집 뒤져도 뭐라 안 하니까.


동료 중 미국인 히스는 영화 <에일리언2>의 힉스 상병이 모델이 아닌가 싶다. 이 게임은 대체로 코믹한 분위기이지만, 곳곳에 암울함이 도사리고 있어 의외의 전개가 펼쳐진다. 히스는 동료로 들어오는 여인과 눈이 맞아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임신시킨다. 그래서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가정용 게임다운 해피한 결말로 가지 않는다.


또,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의 가족들은 달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다들 지구 이주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지구에서 싸우는 자식을 걱정하는 외계인 부모들과 그 혈육들을 보여줘서 에일리언 본거지인 달을 파괴할지 말지 플레이어를 고민에 빠뜨리는 선택문도 있다.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 어머니의 모습도 매우 암울하다.
코믹함과 참혹함이 묘하게 뒤섞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에 가면, 아틀란티스, 레무리아, 무, 모아이, 나스카, 노아의 방주 등 여러 초고대문명설도 얽혀 있다. SFC의 다른 RPG <신성기 오딧세리아>가 생각난다.


몇몇 장면에서 <드래곤 퀘스트5> 영향을 받은 느낌이 난다. 여성 캐릭터가 임신하는 점, 마을 간호사가 파후파후(부비부비)를 언급하는 점, 메달의 왕 비슷한 만두의 왕이 있는 점, 끝판왕을 물리친 뒤 여러 마을을 돌면서 대화하며 마무리하는 점, 엔딩 후에 추가 스토리가 있는 점 등 각본가 코가미 쇼지가 아무래도 드퀘팬이 아닌가 싶다.


엔딩 후 스토리의 라스트 보스는 모든 장비를 벗은 뒤, 회복 마법만 보스에게 써야 물리칠 수 있다. 이걸 모르면 아무리 때려도 턴이 무한 반복된다.


너무 늦게 나오는 바람에 묻혀버린 작품이지만, 그 전까지 나왔던 RPG와 견주어 스토리에 참신한 부분이 있고, 완성도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엔딩 본 날 - 2020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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