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5

이데아의 날


오피스 코칸이 개발하고, 1994년 쇼에이 시스템이 슈퍼패미컴용으로 발매한 RPG.
시나리오, 게임 디자인, 캐릭터 디자인에 만화가 아이하라 코지를 기용했다. 그래서인지 표지부터 범상치 않은 센스가 보인다. 등장 캐릭터들의 외모가 하나같이 괴이하고, 90년대 일본 개그 만화 느낌의 대사가 속출하는데, 스토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져서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물이 몬스터로 이상진화해버린 근미래 지구. 나가사키에서 살던 주인공은 4살 때 박사에게 잡혀 와서 연구소에서 갇혀 지내는 신세다. 소년에겐 초능력이 있어서 박사는 그 근원을 알아내려고 온갖 생체 실험을 해댄다. 10년째 되는 날, 성과가 급한 박사는 소년의 모든 힘을 끌어내려고 과도하게 고문하다가 소년의 폭주로 연구 시설은 파괴되고 박사는 죽는다. 10년 만에 연구소 밖으로 나온 주인공 소년. 박사가 언급한 '이데아'란 누구인가? 주인공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그 실체를 밝혀나간다.


일본, 미국, 멕시코, 캐나다의 실제 도시가 나온다. 후쿠시마는 히로인의 출신지로 나온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나기 17년 전에 나온 게임이니만큼 평범한 마을로 그려진다. 몬스터 바이러스 탓에 혼란스러운 세계라고는 하지만, 마을마다 백화점, 병원, 학교, 호텔, 자동판매기 등 있을 건 다 있다. 그리고 낮이냐 밤이냐에 따라 마을 사람 대사나 위치가 달라진다.


전투는 프런트뷰 턴제 방식이다. 아래에 우리 편 캐릭터들의 얼굴이 나오며 공격받았을 때 표정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점이 신선하다. 현대물답게 칼, 총, 활 등을 무기로 쓰며 캐릭터마다 특수 능력을 쓸 수 있다.


특이한 점은 필드에선 랜덤 인카운터이지만, 던전에선 적의 모습이 보이고 그 적과 닿아야 전투가 시작되는 심볼 인카운터다. 하지만, 그 적들이 주인공 일행을 향해 빠르게 돌진하기 때문에 피하는 건 어렵다. 그나마 해당 적을 없애면 다시 나오지 않아서 이동이 편하다.
초반엔 80년대 RPG처럼 던전 들어가면 시야가 제한되어 컴컴한 경우가 많아 손전등 아이템이 필요하다. 중반쯤 되면 주위를 밝히는 초능력이 생겨서 수월하다.


이벤트 해결이 그렇게 쉬운 편은 아니지만, 대사에서 중요 부분은 다른 색으로 표시되고, 메모 기능도 있어서 편리하다. 이벤트 아이템은 의뢰한 캐릭터나 특정 지점에서 아이템 사용을 직접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자동 진행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 등장인물은 여고생 린코, 스모 선수 라이간, 제령사 미코토, 미국인 의적 쟈드, 닥터 포다. 처음엔 초능력 소년의 이야기부터 시작되지만, 중간중간 주인공이 바뀌며 각자의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다 만나게 된다. 펫(Pet)으로 얻을 수 있는 동물들도 있다. 너구리, 멧돼지, 반어인, 공룡 등이 전투에 참여한다.


캐릭터 디자인은 멋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개그 만화 캐릭터들 같다. 전신 모습을 옷 갈아입히기 화면에서 볼 수 있는데, 자유롭게 옷을 벗기고 입힐 수 있다. 여자 옷(스커트, 브레지어, 팬티 등)을 남자에게 입힐 수도 있어서 변태 같은 옷차림도 가능하다. 투명 브레지어 등 희한한 의상도 있다. 백화점에서 옷 사서 갈아입힐 때 UI가 불편하고 느려서 인내심이 필요하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주인공 일행은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세력을 알게 되고 그들을 뒤쫓는다. 그 배후에는 '이데아'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이데아는 여러 마을에서 성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남들을 도우며 착한 일을 하던 이데아는 인간들의 추악함을 보게 되고, 그 뒤로 인간 불신에 빠져 인류를 멸망시키고 유토피아를 만들 계획을 꾸민다. 이데아는 추종자들을 시켜 생물을 이상진화시키는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지구의 축을 건드려서 도시들을 물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발한 아이들만 노아의 방주에 태워서 인류 멸망 후 그들을 지도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이었다.


주인공 일행은 이데아와 만나 "착한 사람들도 많은데, 다 죽일 작정이냐"고 설득하지만, 이데아는 코웃음 치며 "그럼, 너희들이 착한 사람 대표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돈과 경험치를 얻기 위해 수많은 생물을 학살했고,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서 물건을 훔친 너희가 착한 사람이라고?"라고 받아친다.


이데아는 도망가고, 주인공은 이데아가 살던 곳에서 이데아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증거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결국엔 이데아의 광기를 물리치고, 세상의 평화를 되찾는 주인공 일행.


엔딩에서 주인공은 똑같이 고아가 된 히로인 린코에게 후쿠시마에서 같이 살자는 권유를 받지만, 자신은 10년 동안 갇혀 지냈기에 넓은 세상을 더 보고 싶다며 떠나려 한다. 그런데, 거기서 린코의 충격 고백! 주인공 아이를 임신했단다. 언제 했던 것이냐? 안 보여줬잖아? 게다가 중고딩 나이밖에 안 된 미성년자들이!!?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었던 주인공은 마지못해 린코와 결혼하고 아이 낳아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일러스트 보고 별로 할 맘이 안 났지만, 초반 주인공이 고문당하며 시작하는 점, 마을 사람이 단체로 주인공에게 사기 치는 이벤트, 주인공이 중간중간 바뀌는 점이 흥미로워서 끝까지 하게 되었다. 내용이 방대한 편이고, 막히는 곳도 많고, 필수 아이템 찾는 게 쉽지 않아서 고역이었다. 초능력자 피스를 상대할 땐 아군을 일부러 혼란 상태로 만들어서 싸워야 이길 수 있는데, 힌트가 없어서 헤맬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리고 레벨은 자그마치 999까지 올릴 수 있다. 당시 RPG에선 볼 수 없었던 수치다. 두 자리 레벨로 엔딩 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999까지 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여러모로 근성이 필요한 RPG다.


디자인과 설정에 호불호가 갈려서 괴작으로 꼽는 사람도 있지만, 숨겨진 요소 찾는 재미가 있고, 여러 단서가 맞물려서 퍼즐이 맞춰지는 스토리가 나쁘지 않았다. 더 대중적인 색을 입혔다면, 개성은 사라졌겠지만, 좀더 많은 이가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슈퍼패미콤 RPG에서 상위권에 두고 싶은 작품이다.


엔딩 본 날 - 2020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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