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5

워즈 워스 Window 10 대응판

워즈 워스는 1993년 엘프에서 PC9801, X68000, FM-TOWNS용으로 발매한 성인용 던전 RPG입니다. 윈도우 PC용으로도 대폭 리메이크되었는데, 2017년에 나온 다운로드 전용 버전이 윈도우10을 지원합니다.

동급생과 드래곤 나이트의 개발진이 손을 잡고 만들어 일본에선 18금 판타지 RPG 중 고전 명작으로 평가받았다고 하는데, 한국에선 끝까지 해보신 분이 그리 많지 않아 다른 엘프사 게임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것 같더군요.

해보니 왜 그런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한글화 패치가 없다는 점을 빼더라도 길 찾기가 쉽지 않은 3D 던전에 불편한 인터페이스 탓에 진행하는 데 장벽이 있습니다. 게임 컨트롤러를 지원하지 않아 키보드 또는 마우스로 조작해야 하는 점도 고역입니다.

하지만, 조작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런대로 할만하더군요. 3D 던전의 길 찾기는 헷갈리지만, 오토 맵핑을 지원하고, 맵에서 가고 싶은 위치를 마우스로 클릭하면 자동으로 이동하는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워프 아이템도 있구요.

또 다른 난관은 제 PC의 윈도우11하고 궁합이 안 맞는지 대화 중 에러 메시지가 종종 뜨고 간혹 튕기는 경우도 있어서 불안불안했습니다. 던전 한 층을 거의 클리어해 놓고 게임이 갑자기 중단될 때는 정신적 타격이 컸습니다.

그래서 던전을 어느 정도 진행하다 마을로 돌아가서 세이브하는 식으로 중단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세이브를 아무데서나 할 수 있게 해놨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죠.

그런 어려움에도 이 게임을 끝까지 진행했던 까닭은 초반 몰입감이 좋고, 미소녀 그림체가 취향이어서였습니다.

PC9801 원판과 견주면 그래픽이 훨씬 좋아진 대신, 18금 장면이 덜 과격해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보여줄 건 다 보여줍니다.

어떤 세상에 지하에는 그림자 일족이 살고, 지상에는 빛의 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상과 지하 사이에는 신이 만들었다는 ‘워즈 워스 석판’이 있었습니다. 이 석판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평화의 상징이었는데, 어느 날 이 석판을 누군가가 부수면서 그림자 일족과 빛의 일족은 서로를 석판을 부순 범인으로 단정하고 100년 넘게 전쟁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림자 일족의 왕자입니다. 인간 계열인 빛의 일족이 아니라 마족 계열인 그림자 일족으로 시작하는 게 흥미롭더군요.

주인공은 허약하지만, 소꿉친구 샤론에게 인정받기 위해 빛의 일족과 싸우면서 점점 성장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여인과 이런저런 일도 합니다.

전투 방식이 랜덤 인카운트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심볼 인카운트이고 적도 그렇게 많이 나오는 편이 아니라서 스트레스는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전투는 적에게 접근해서 검으로 베는 식의 단순 구성입니다. 타격감이 좋거나 하진 않습니다. 엘프는 이런 부분보다 스토리와 미소녀 그림에 중점을 두는 제작사였죠.

스토리는 흥미로웠습니다. 1부에서 그림자 일족으로 빛의 일족과 싸우던 주인공은 20년이 지난 2부에선 빛의 일족 편에 서서 그림자 일족과 싸우게 됩니다. 주인공의 정체는 과연?
20년이 흘러가며 인간 캐릭터들은 나이가 들고 그들의 자식들이 활약하게 됩니다. 이런 세대를 뛰어넘는 장대한 이야기가 재밌더군요.

던전 안에서 꼭 거쳐야 할 많은 이벤트가 있고, 중요 아이템이 숨겨진 곳에 있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공략 없었으면 100% 포기했을 겁니다.

끝판왕을 만나려면 부서진 석판 조각들을 다 모아야 하는데, 하나를 못 찾아서 포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어떤 조각을 빼놓고 진행했는지 던전 한층 한층 다시 가보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그게 초반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석판 조각임을 알고 허탈했습니다.

많은 떡밥이 마지막에 몰아서 회수되는 게 급작스럽고 끝판왕의 위용이 아쉽지만, 나름 깔끔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애인으로 삼을지에 따라 엔딩이 달라집니다. 하렘 엔딩도 가능한데, 저는 제 취향대로 골랐습니다.

빛과 그림자의 싸움, 그리고 그 빛과 그림자가 없는 곳은 어둠뿐이라는 거.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는 점에서 전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한다는 게 이 게임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빛, 그림자, 어둠이 절묘하게 조화된 스토리이네요.

어려운 만큼 성취감이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드래곤 나이트 4만큼 꽤 좋았다고 생각해요.
18금 게임에 이 정도 정성을 쏟아 만들 수 있었던 엘프가 그립습니다.


엔딩 본 날 - 2023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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