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13

대항해시대

1990년대 초 286, 386 IBM PC가 가정에 보급될 무렵이었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공부나 생활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가장 관심있던 게임 분야도 예전 애플 게임들을 생각나게 하는 초라한 그래픽과 양키 센스의 게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패미콤이나 MSX의 일본 게임과 견주면 정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PC에도 코에이사를 필두로 일본 게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장만한 PC에 깔려 있던 게임이 바로 대항해시대1 영문판이었는데, 난 이 게임에 빠져서 밤을 샜다.


포르투갈인인 주인공이 배를 타고,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무역을 하는 이 게임의 진행 방식은 지금 봐도 참신하고 파격적이라고 생각한다. 바다 한 가운데서 식량과 물이 떨어져서 죽을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어느 곳의 특산물이 무엇이고, 그 물건을 어디에 팔아야 이익이 많이 남을지 필기까지 해가며 열심히 했다. 결국 사회과부도의 지도까지 동원해서 세계 곳곳의 지명을 외우기까지 했다. 그런 걸 보면 공부도 되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늘 가까운 유럽에서 놀다가, 머나먼 아시아나 중동 쪽으로 떠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돈과 식량을 가득 채우고, 폭풍우와 해적을 피해서 그 머나먼 미지의 땅에 도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착해도 그곳에서 투자한 만큼 이익을 남길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가보고 실망했던 것은 항구도 초라하고, 사람들 복장이나 건물도 조선시대와 거리가 먼, 무슨 일본의 속국처럼 묘사된 점이었다. 아무리 일본 게임이지만, 이웃나라를 이렇게 대충 만든 점 때문에 코에이가 얄밉기도 했다.


술집에서는 카드 게임을 할 수 있었는데, 이걸로 푼돈은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 하다 보면 본업인 무역은 팽개치고, 한탕주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나중에 돈이 모이고, 좋은 배와 선원들이 많아지면, 해적질 또는 해적소탕일을 해서 큰돈을 벌어들였다. 이쯤 되면 더이상 무역일은 하지 않게 된다. 명성이 오르면 공주를 구하는 이벤트가 생기고, 그 이벤트를 끝내면 감동의 엔딩이 펼쳐진다.


이 게임의 매력은 역시 높은 자유도에 있다. 돈을 모으는 방법도 여러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래픽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볼품 없지만, 오히려 그것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요즘 게임들은 그래픽이 너무 세밀해져서 상상력의 여지를 모두 없애버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중에 2편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는 영문판이 아닌 일본DOS 기반의 일본판만이 돌아다녔다. 떨어지는 PC 사양 때문에 당장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슈퍼패미콤판으로 하게 되었는데, 전작보다 모든 편에서 파워업되었고, 주인공을 선택할 수도 있어 걸작으로 꼽히는 게임이다. 아마도 2편을 시리즈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2편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작곡가 칸노요코의 음악이었다. 특히 오프닝 음악이 무척 좋다.

대항해시대는 이후 4편에, 온라인 게임까지 나왔지만, 1편과 2편의 감동은 많이 사그런 진 듯 하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옛날 대항해시대를 하면서 망망대해를 다시 누비고 싶다.

댓글 5개:

  1. eolin에 잘 안 들리는데, 모처럼 들어갔다 글 제목 보고는 안 들어와 볼 수가 없었습니다. :)
    정말 멋진 게임이었죠. ^^

    제 중학교 시절, 부모님 몰래 잠자는 척 하곤 부모님 주무실때 까지 기다렸다, 몰래 일어나 밤새 플레이하다 아침을 맞던 기억이 있는 게임입니다. ^^

    덕분에 간만에 예전의 추억을 떠올려 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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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말 좋은 게임 그시절이 그립네요.
    집 한구석에서 대항해시대를 하며 세계여행을
    꿈꾸던 시절
    지금 생각해도 가슴 설레이는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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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144076440_water1.zip (649KB) 제작사 : 코에이(KOEI) 제작년도 : 1991 실행파일 : play.bat 운영체제 : 도스 언어 : 영어 사운드 : IBM, 애드립 최소사양 : XT, 640KB 대항해시대는 14세기에 시작된 신대륙 발견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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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 정말 옛날 생각나게 하는 게임이네요 2편을 먼저 하고 1편을 해보려고 했는데 영문판이라 귀찮아서 안하고 2편만 반복해서 쭉 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게임이 진정 자유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게임 같아요 카탈리나 에란초.. 참 멋진 여해적이죠..ㅋ 다른 캐릭은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ㅎ
    나중에는 게임위자드라는 게임 에디트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걸로 물과 식량을 최하 수치에 맞춰놓고 그 수치를 고정 시켜서 물과 식량 걱정없이 세계를 돌아다녀서 지도도 다 펴놓고 그랬었는데... 아 도스게임이나 구해서 다시 즐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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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호오, 전 삼촌네 286컴퓨터 샀다길래 흑백모니터로 처음 대항해시대가 뭔지도 모르고, 항해도가 세계지도인지도 모르고 항구를 돌아다녀보다가 교역도 아무거나 하다가 항해중에 그냥 배드엔딩나와서 집어치웠다가 1990년 4월인가? 월간 마이컴에 완벽공략을 보고 미친듯이 밤낮을 즐기던 그 게임이군요...격세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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