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1

소울&소드 - 90년대 초반 프리시나리오 RPG


소울&소드는 판도라박스가 개발하고 자무스가 1993년에 발매한 RPG다. 1991년 로맨싱사가의 프리시나리오 시스템이 나온 뒤, 이 게임도 프리시나리오를 채택했다. 로맨싱사가는 유명한데, 이 게임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기대 안 하고 해봤다.


모험자들이 몰려드는 어떤 섬에 주인공(16살) 또한 모험을 위해 도착한다. 이 거대한 섬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료를 모으고 함께 이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 이벤트는 34개가 있는데, 내키는 순서대로 깨면 된다. 특이하게도 게임 내에 시간의 개념이 있어서 이동하거나 잠을 자면 시간이 흐른다. 34개 중 9개의 이벤트는 특정 기간에만 겪을 수 있어서 날짜를 기억해둬야 한다.


그리고 10년이라는 기한이 있다. 주인공이 섬에 온 지 10년이 지나면 무조건 엔딩이다. 딱히 10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아무때나 항구로 가서 떠나도 엔딩이다. 그 시점에 몇 개의 이벤트를 클리어했느냐에 따라 엔딩 내용이 바뀐다. 선택에 따라 중간중간 베드엔딩도 있다.


레벨업은 사가 시리즈나 파이널 판타지2처럼 각각의 능력치가 별개로 오르는 방식이다. 그래픽은 소박하다. 마을이 옛날 대항해시대처럼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고 걸어다닐 수 있는 필드가 따로 없다. 지명을 선택해서 이동한다. 이벤트 시에만 일반 RPG처럼 걸어다닐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같은 프리시나리오 시스템인 로맨싱사가 시리즈와 견준다면, 소울&소드는 B급 냄새가 강하다. 균형이 안 맞는 전투, 무의미하게 넓은 던전, 던전 탈출이나 워프 마법이 없어서 받는 스트레스 등, 여러 부분이 세심하지 못하고 조잡하다. 레벨을 올리면 우리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적도 강해져서 어려움이 있다.


스토리 면에서도 어떤 큰 줄기가 없다. 메인 스토리 없이 그냥 서브퀘스트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로맨싱사가의 경우는 전체를 관통하는 큰 스토리가 있었는데, 소울&소드는 그런 게 없다. 라스트 보스가 없으니 최종 목적이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제작자의 노림수로 보인다. 원래 RPG라는 건 목적을 제작자가 아닌, 플레이어가 정하는 것이다. 엔딩을 아무때나 볼 수 있게 해둔 건, 클리어보다는 과정을 즐기라는 뜻이 아닐까. 물론, 이 게임에 나오는 모든 이벤트를 클리어하면 트루 엔딩이 나오는 보상 정도는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엔딩을 볼 수도 있고, 돈 빌렸다 못 갚아서 강제 엔딩을 맞기도 하고, 종교 단체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도 엔딩이다.


소울&소드의 이벤트들은 대부분 간단해서 지루한 편이었지만, 일부 이벤트는 묘한 느낌을 줬다. 자매를 주인공에게 떠맡기고 양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 도망가버린다든가 어린애가 자기 동생을 어떻게 한다든가... 가정용 게임에선 수위가 아슬아슬한 내용이 나온다.


가장 임팩트 있는 이벤트는 '정령 왕국'이었다. 기존 JRPG의 클리세를 비꼬는 내용이라 웃겼다. 이 이벤트가 이 게임에서 가장 길면서 가장 핵심이다.
이 이벤트의 대사를 소개하자면

마도사 "용사여! 우리 왕국이 대마왕에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남캐 "왜?"
마도사 "왜라뇨? 당신... 음... 대마왕에게도 대마왕의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남캐 "모르겠는데?"
마도사 "전 대마왕의 사정 같은 건 모릅니다. 어쨌든 쳐들어 왔습니다. 전설의 서에 따르면 이 왕국에 위기에 빠졌을 때 다섯 명의 용자가 이 땅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 머리에 든 건 없고 힘만 센 머슴아..."
여캐 "어머, 멋진 전설이네. 믿어 줄게."
남캐 "머리에 든 건 없.. 뭐? 네가 들고 있는 게 그 전설의 서냐? 그거 보여줘 봐. 정말로 그렇게 적혀 있는지 확인해보게."
마도사 "안됩니다."
남캐 "시끄러! 그 책 보여줘!"
마도사 "앗"
남캐 "뭐야, 이 책은! 아무것도 안 쓰인 백지 아냐? 구라쳤구나!!"
마도사 "아닙니다. 그건 머리 좋은 사람밖에 못 읽는 책이에요. 당신 못 읽나요?"
남캐 "이 자식, 처맞을래!"


소울&소드는 수작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정령 왕국' 이벤트는 하면서 즐거웠다. 다른 건 안 해도 이건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이벤트만으로도 이 게임은 가치가 있다. 이와 반대로 '저주의 인형' 이벤트는 내용이 서늘하다. 극과 극을 달리는 이벤트가 뒤섞인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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