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7

삼성 겜보이(세가마스터시스템) 이야기

패미컴과 경쟁했다가 장렬히 패배했던 세가마스터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선 1989년 4월, 삼성전자에서 '삼성 겜보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해서 패미컴이 자리잡기 전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삼성의 광고 물량 공세가 컸다고 봅니다. 게임기 하면 무조건 '재믹스'를 떠올리던 그 시절, '겜보이'가 한때 게임기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2년에 삼성 겜보이를 '알라딘 보이'라고 개명했는데, 개인적으로 유치한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겜보이가 훨씬 좋았어요.

이후, 일본에도 발매되지 않은 컴팩트 버전인 마스터시스템2가 '삼성 겜보이 2'라는 이름으로 나왔다는데, 한국에선 이미 패미컴에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이라 별 관심을 못 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건 지금 구하려면 가격이 상당할 것 같네요.

당시 세가마스터시스템에 눈이 안 갔던 까닭은 꼭 하고 싶은 게임이 별로 없어서였어요. 슈퍼마리오도 없고... 오락실에서 한물 가기 시작한 게임을 다운 이식했단 인상이었어요. 어린 눈에도 게임이 다양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경쟁 상대인 패미컴의 클론 기종과 복제팩의 저가 공세로 비싸고 게임도 별로 없는 삼성겜보이를 택할 이유가 없었죠.

그러나 삼성이란 대기업 브랜드 덕에 세운상가 등지에서 짝퉁으로 팔리는 패미컴보다는 삼성겜보이를 사주는 부모님이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짝퉁 패미컴들은 AS도 시원찮았으니까요. 하지만 애들은 알았죠. 패미컴 쪽이 게임이 더 많고 재밌다는 것을.

삼성은 환타지 스타, 화랑의 검(원제: 검성전), 알렉스 키드 같은 게임들을 한글화해서 내주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그 시절에 환타지 스타 같은 RPG를 한글화한 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1987년에 나온 구작 게임을 1991년 12월에서야 한글판으로 냈는데요. 이미 한국은 패미컴이 장악한 상태였고, 겜보이로는 신작 게임이 잘 안 나오는 상황이었어요. 환타지 스타 한글판만 보고 겜보이를 사기에는 리스크가 컸죠.

환타지 스타 한글판이 2년만 일찍 나왔어도 혹해서 겜보이를 선택했을 수도 있겠네요. 이후 세가의 삽질로 고난의 행군을 했겠지만요. -_-;

세가마스터시스템 게임을 지금 돌려보면, 패미컴보다 확실히 나은 그래픽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색 수가 더 많아 화면이 더 세련되고 화사했습니다. 일본 오리지널 세가마스터시스템 기준으로 사운드도 패미컴보다 나았구요.

아니, 이 좋은 게임기로 패미컴에 졌다니요.

'세가 게임기의 게임은 세가에서 만든다'는 고집 탓에 게임 타이틀 부족에 시달린 게 너무 아쉬운 게임기입니다.

세가마스터시스템 게임 중 좋아하는 게임들입니다.

원더보이 인 몬스터랜드

오락실 원더보이2를 너무 좋아해서 그 시절, 이 게임이 겜보이에 있는 걸 알았다면 넘어갈 수도 있었겠어요.

비록 오락실판보다 다운 이식이지만, 세가마크시스템판만의 오리지널 스테이지와 새로운 보스 메듀사가 추가되어서 원판을 즐긴 사람도 다시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이널 버블보블

오락실판 원작은 100판으로 끝나지만, 이건 200판이나 됩니다. 세가마크시스템의 성능상 그래픽과 음악은 원작보다 좋을 순 없지만, 내용이 더 세밀하고 추가된 것이 많습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며 적을 퇴치하는 요정 아이템, 더 많아진 보석방 비밀문, 추가된 중간 보스, 더 길고 구체적으로 묘사된 엔딩 등 내용 면에선 원작을 뛰어넘습니다.

MSX1(재믹스) 게임들

MSX1이랑 하드웨어 구조가 비슷해서 MSX1 게임을 컨버전한 게임이 있습니다. 겜보이 말기에 국내에서 여러 합팩이 나왔는데, 거의 MSX1 게임 모음집이었어요. 초반에 이런 게 많이 나왔으면 게임 타이틀 부족 해소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MSX1 저용량 게임들이 대부분이지만, F1 스피릿, 꿈대륙 어드벤처, 그라디우스, 그라디우스2, 마성전설2 같은 메가롬팩 게임도 있었습니다. 마성전설2의 경우는 보스 불러낼 때 키보드 입력이 필요한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해놨는지 궁금하네요.

삼성 겜보이에서 돌아가는 재믹스 게임을 보고 있으면, 원래 겜보이 게임인 듯 어울립니다.

결과적으론 패미컴을 넘지 못하고 소수만 열광하는 게임기로 끝났지만, 성능 보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게임기입니다.

2023-12-18

더블 드래곤 2 게임보이판

게임보이용 <더블 드래곤 2>는 <열혈경파 쿠니오군 번외난투편>를 해외에 발매하면서 동사의 더블 드래곤 세계관으로 바꿔서 출시한 게임이다. 다른 게임 같지만, 기술, 게임성은 열혈경파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열혈 경파 쿠니오군 번외난투편>을 재밌게 즐긴 추억이 있었는데, 다시 해보는 김에 이번엔 해외판으로 해보기로 했다.

실기론 화면만 확인하고 실제 플레이는 에뮬로 함

난이도는 EASY, NORMAL, HARD가 있지만, EASY로 하면 중간에 끝나버리기 때문에 모든 스테이지를 즐기려면 NORMAL이나 HARD를 골라야 한다. HARD로 해도 별로 어려운 게임이 아니기에 난 HARD를 골랐다.

그래픽, 캐릭터, 배경이 달라져서 코믹한 분위기의 원작보단 삭막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AB 동시 누르기로 필살 어퍼컷을 쉽게 쓸 수 있어서 조작이 간편하다. 필살 어퍼컷만 잘 구사해도 클리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쓰러진 적 앞에서 버튼 누르면 니 드롭으로 공격한다.

게임보이 스펙상 적은 한 화면에 두 명까지만 나온다. 그래서 게임이 쉽다. 두 명 정도야 요리조리 피하면서 때려 눕힐 수 있다.

지금 해보니 비슷한 배경과 적이 반복되어 좀 지루한 감은 있지만, 어린 시절엔 타격감이 넘 좋아서 자주 즐겼다.

빠르고 위협적인 필살기를 구사하는 끝판왕을 물리치면, 간단한 엔딩이 나온다.

옛날 더블 드래곤을 간소화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게임보이에서 이 정도 타격감의 액션 게임은 당시 귀했다. 왕년의 액션 게임 명가 테크노스 저팬답게 호쾌한 게임이다.


엔딩 본 날 - 2023년 12월 18일

2023-12-15

워즈 워스 Window 10 대응판

워즈 워스는 1993년 엘프에서 PC9801, X68000, FM-TOWNS용으로 발매한 성인용 던전 RPG입니다. 윈도우 PC용으로도 대폭 리메이크되었는데, 2017년에 나온 다운로드 전용 버전이 윈도우10을 지원합니다.

동급생과 드래곤 나이트의 개발진이 손을 잡고 만들어 일본에선 18금 판타지 RPG 중 고전 명작으로 평가받았다고 하는데, 한국에선 끝까지 해보신 분이 그리 많지 않아 다른 엘프사 게임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것 같더군요.

해보니 왜 그런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한글화 패치가 없다는 점을 빼더라도 길 찾기가 쉽지 않은 3D 던전에 불편한 인터페이스 탓에 진행하는 데 장벽이 있습니다. 게임 컨트롤러를 지원하지 않아 키보드 또는 마우스로 조작해야 하는 점도 고역입니다.

하지만, 조작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런대로 할만하더군요. 3D 던전의 길 찾기는 헷갈리지만, 오토 맵핑을 지원하고, 맵에서 가고 싶은 위치를 마우스로 클릭하면 자동으로 이동하는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워프 아이템도 있구요.

또 다른 난관은 제 PC의 윈도우11하고 궁합이 안 맞는지 대화 중 에러 메시지가 종종 뜨고 간혹 튕기는 경우도 있어서 불안불안했습니다. 던전 한 층을 거의 클리어해 놓고 게임이 갑자기 중단될 때는 정신적 타격이 컸습니다.

그래서 던전을 어느 정도 진행하다 마을로 돌아가서 세이브하는 식으로 중단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세이브를 아무데서나 할 수 있게 해놨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죠.

그런 어려움에도 이 게임을 끝까지 진행했던 까닭은 초반 몰입감이 좋고, 미소녀 그림체가 취향이어서였습니다.

PC9801 원판과 견주면 그래픽이 훨씬 좋아진 대신, 18금 장면이 덜 과격해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보여줄 건 다 보여줍니다.

어떤 세상에 지하에는 그림자 일족이 살고, 지상에는 빛의 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상과 지하 사이에는 신이 만들었다는 ‘워즈 워스 석판’이 있었습니다. 이 석판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평화의 상징이었는데, 어느 날 이 석판을 누군가가 부수면서 그림자 일족과 빛의 일족은 서로를 석판을 부순 범인으로 단정하고 100년 넘게 전쟁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림자 일족의 왕자입니다. 인간 계열인 빛의 일족이 아니라 마족 계열인 그림자 일족으로 시작하는 게 흥미롭더군요.

주인공은 허약하지만, 소꿉친구 샤론에게 인정받기 위해 빛의 일족과 싸우면서 점점 성장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여인과 이런저런 일도 합니다.

전투 방식이 랜덤 인카운트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심볼 인카운트이고 적도 그렇게 많이 나오는 편이 아니라서 스트레스는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전투는 적에게 접근해서 검으로 베는 식의 단순 구성입니다. 타격감이 좋거나 하진 않습니다. 엘프는 이런 부분보다 스토리와 미소녀 그림에 중점을 두는 제작사였죠.

스토리는 흥미로웠습니다. 1부에서 그림자 일족으로 빛의 일족과 싸우던 주인공은 20년이 지난 2부에선 빛의 일족 편에 서서 그림자 일족과 싸우게 됩니다. 주인공의 정체는 과연?
20년이 흘러가며 인간 캐릭터들은 나이가 들고 그들의 자식들이 활약하게 됩니다. 이런 세대를 뛰어넘는 장대한 이야기가 재밌더군요.

던전 안에서 꼭 거쳐야 할 많은 이벤트가 있고, 중요 아이템이 숨겨진 곳에 있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공략 없었으면 100% 포기했을 겁니다.

끝판왕을 만나려면 부서진 석판 조각들을 다 모아야 하는데, 하나를 못 찾아서 포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어떤 조각을 빼놓고 진행했는지 던전 한층 한층 다시 가보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그게 초반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석판 조각임을 알고 허탈했습니다.

많은 떡밥이 마지막에 몰아서 회수되는 게 급작스럽고 끝판왕의 위용이 아쉽지만, 나름 깔끔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애인으로 삼을지에 따라 엔딩이 달라집니다. 하렘 엔딩도 가능한데, 저는 제 취향대로 골랐습니다.

빛과 그림자의 싸움, 그리고 그 빛과 그림자가 없는 곳은 어둠뿐이라는 거.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는 점에서 전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한다는 게 이 게임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빛, 그림자, 어둠이 절묘하게 조화된 스토리이네요.

어려운 만큼 성취감이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드래곤 나이트 4만큼 꽤 좋았다고 생각해요.
18금 게임에 이 정도 정성을 쏟아 만들 수 있었던 엘프가 그립습니다.


엔딩 본 날 - 2023년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