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

그란디아 2 HD 리마스터

<그란디아 2 HD 리마스터>는 2000년 드림캐스트용으로 처음 나왔고, 2021년 윈도우용으로 HD 리마스터되어 나온 RPG다.
전작은 세가새턴의 최고 명작 RPG로 꼽히며, 많은 게이머를 홀린 작품이었지만, 2편은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평작으로 남았다.
그래서 큰 기대 안 하고 2편 HD 리마스터판을 PC로 해봤다. 완벽 한글화이고, 한국어 음성 패치를 하면 중요 대사에서 우리말 성우 음성도 들을 수 있다.

드림캐스트판과 플스2판을 전에 잠깐 해본 적이 있는데, HD 리마스터판이 해상도가 높아서 원작보다 훨씬 깔끔한 화면을 보여준다. 그 덕에 나온 지 20년이 넘은 고전인데도 첫인상이 좋았다.

히로인 격인 엘레나는 신앙이 독실하고 순수한 소녀다. 전형적이지만, 취향에 맞아서 매력적으로 보였다.

엘레나와 완전 반대 성격인 밀레니아도 나오는데, 꽁꽁 싸맨 옷을 입고 다니는 엘레나와 달리 노출도가 높은 옷차림이다. 입이 험한 밀레니아도 매력적이다. JRPG는 여캐가 얼마나 매력적이냐가 게임을 계속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신앙이 독실한 엘레나와 달리 주인공 류도는 무신론자에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캐릭터다. 신분과 성향에서 격차가 큰 류도와 엘레나이지만, 모험을 하면서 점차 가까워진다. 현실에선 저렇게 종교에 대한 관점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 순탄하게 맺어질 수 있을까? 결혼 생활 내내 힘들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현실에 찌들었다는 증거지. ㅎㅎㅎ

주인공 일행의 연령대가 전작보다 높고, 종교에 얽힌 스토리도 주제가 무거운 편인데, <그란디아 1>을 즐긴 소년들이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걸 고려한 게 아닌가 싶다.
세계관은 전작과 하나도 이어지지 않는다. 시스템만 계승한 독자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전투 시스템은 전작보다 다듬어져서 지금 즐기기에도 쾌적하다. 랜덤 인카운터가 없다. 탐험 지역에서 몬스터들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돌아다녀서 플레이어들은 직접 전투하거나 피해 다닐 수 있다. 원한다면 몬스터 뒤로 접근하여, 선제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다. 전투에선 IP게이지를 보고 공격 시점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순서를 파악하면 알맞게 전략을 세워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카메라 각도를 돌릴 수 있는 3D 화면은 개인적으론 불편했다. 문, 계단, 보물상자 등이 지형에 가려서 안 보일 때 돌려서 보긴 하는데, 그러면 방향감각을 상실할 때가 있었다. 나침판이 있어도 헷갈렸다. 그래도 아주 짜증 나는 미로나 퍼즐은 거의 없는 편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했다.

스토리는 빛의 신이 정말 선이고, 어둠의 신은 정말 나쁜 걸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다가 반전이 나오고 약간 비튼다. 흥미롭게 진행되나 기대했지만, 이내 원래의 전형적인 이야기로 돌아온다. JRPG를 많이 해봤다면, 쉽게 예측이 가능한 전개다. 선은 완벽한 선이고 악은 끝없이 악이고, 주인공 일행은 세상을 위해 무상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JRPG 특유의 오글오글한 대사는 덤. 

달이 등장하고 히로인이 가희라는 점이 <루나 실버스타 스토리>를 떠올리게 했다. 같은 게임아츠 작품이어서 익숙한 느낌이 난다.

윈도우PC용 HD 리마스터는 고해상도로 무난하게 그래픽이 개선되었지만, 프레임과 동영상 화질은 그대로였다. 고해상도 게임 화면을 보다가 중간중간 나오는 저해상도 구린 동영상은 위화감을 준다. 심각한 버그는 없었고, 15시간쯤 되는 플레이 타임 동안 세 차례 튕김은 있었다.

1편과 견주면, 스토리 면에서 대단히 아쉬운 작품이다. 1편이 워낙 명작이었기에 높은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실망감이 세간의 평가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1편을 떼어놓고 본다면, 일반적인 RPG로서 충실한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급은 아니지만, 망작도 아닌, 고만고만한 평작이며, 2편만 즐겼던 사람 중엔 높이 평가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난 처음부터 기대치를 대폭 낮추고 했기에 나름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았다. 드림캐스트 RPG 중에서는 고품격 클래식 RPG 타이틀을 얻을 자격이 있지 않나 싶다.


엔딩 본 날 - 2023년 6월 29일 

2023-06-22

고전 18금 게임 지침서 <미소녀 게임의 세계>

1998년에 나온 책인데요. 일본 18금 미소녀 게임의 역사와 그 내용에 관해 시간순으로 소개한 책입니다.
당시 한국에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다는 데 놀랐고, 그 내용의 충실함과 방대함에 또 놀라서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중고로 구하기 매우 힘들 거예요.

저자는 1970년생 남창훈 씨라고 합니다. 1인 출판사 하신다는 글을 2015년도 즈음에 봤습니다. 

머리말에서 당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일본 대중문화와 비교하며 한국 문화의 낙후성을 지적했는데요. KPOP,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줄은 1998년 당시엔 상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미소녀 게임이 많았던 MSX를 비롯해 PC9801 등 기종에 관해서도 언급합니다. 당시 MSX2 디스크 드라이브 보유했던 분들은 18금 게임도 아마 하셨을 듯.

<삼국지 2> PC9801판에 저런 장면이 있었다는데, 아쉽게도 당시에는 못 해봤네요.

그림체가 제 취향이었던 그 시절 미소녀 게임. 주로 PC9801용 게임이 많습니다. <일루미나> 같은 게임은 나중에 에뮬로 해봤는데, 내용은 빈약했지만 일러스트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90년대 소년들이 많이 해봤을 <천사들의 오후3>. 그 시절 학생들에겐 충격적인 게임이었죠. CAL은 PC엔진판으로 했다가 완전 순화 버전인 걸 알고 대실망. 나중에 MSX판으로 해보고 삭제된 부분을 다 확인했죠. ㅎ

나이키. 여주인공이 마음에 들어서 했던 게임. MSX로 했던가 가물가물합니다.

18금 게임은 아니지만, 당시 큰 인기를 얻었던 <졸업>. 전 이 게임 주제곡을 너무 좋아합니다. 일본어 모르면서도 PC엔진용 <졸업 2>를 자주 했죠.

엘프의 간판 시리즈였던 <드래곤 나이트>. 개인적으론 2편을 좋아합니다.

PC엔진CD로 처음 나와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도키메키 메모리얼>. 전 PC엔진판을 했는데, 일본에서 큰 붐이 인 건 플레이스테이션판부터라고 하더군요. 

90년대 10~20대 남성이고 PC 유저인데, <동급생2>를 몰랐다면 인생 헛 산 것. 책에는 중요 장면의 대사를 번역해놨네요.

<에이미라 부르지마!>. 시즈웨어 작품이고 표지가 자극적이라 해본다 해본다 하고 세월이 꽤 지났네요.

여러 번 리메이크된 <이브 버스트 에러>. 여주인공 마리나의 매력에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충격이었죠. PC9801판이 아마 그런 장면 다 나오고, 이후는 순화되어 나온 버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미소녀 어드벤처 게임의 걸작이지만, 후속작들은 이 첫 편의 아성을 못 넘고 있습니다.

아는 분은 아는 수작 RPG <흑의 검>. 18금 분위기인데, 18금은 아닙니다. 어른스러운 그림체와 비장한 면 때문에 좋아했습니다. 만일 리메이크 한다면 그분 살리는 루트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앨리스소프트의 <데아보리카>. 사랑하는 연인이 환생을 반복하는 이야기. 잔혹하고 반전 있고 그렇습니다.

시즈웨어의 또 다른 걸작 <데자이어>. 마지막 반전이 놀라웠습니다. 그런 신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던...

<Luv Wave>. SF 어드벤처. 네트워크 안을 돌아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존재와 맞서는 형사 이야기인데, 블레이드 런너 분위기가 납니다.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마무리가 난해한 작품. 버그가 많았습니다.

유명한 <취작>. 변태 관리인이 여자들 협박해서 욕구를 채웁니다. 한글 패치도 나왔다고 함.

마지막 쪽엔 다른 책 광고가 있네요. 저 에뮬 게임 책들 저도 샀지요. 에뮬 게임 롬이 꽉꽉 담긴 CD를 4장이나 줘서 롬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었습니다. 원하는 롬 파일 수집이 쉽지 않은 시대였거든요. 지금이라면 게임 저작권 때문에 나오기 힘든 책이겠지요.

이 책은 그 시절 제가 미소녀 게임을 고르는 데 지침서 역할을 해줬습니다. 볼 때마다 그 시절 했던 미소녀 게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