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7

천사들의 오후 3 번외편

1990년에 PC8801, PC9801, X68000용 디스켓으로 발매된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이 시리즈 중에선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체(원화 마키노 류이치)다.

1990년대 중반 IBM PC로 돌아가는 버전이 한국에 퍼지자 많은 소년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일본에선 이런 에로 게임이 이미 흔했지만, 당시 한국에선 처음 보는 파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여학생을 꼬드겨서 잠자리를 하는 게 목적인 게임이라니...
일본어를 몰라도 노모자이크의 수위 높은 그림을 보기 위해 많은 중고생이 눈에 불을 켜고 클릭을 해댔다. 그 시절 PC 가진 남학생은 직접 해보거나 명성을 들었을 것이다.

어릴 땐 일본어를 몰라서 그림만 보고 내용을 추측했기에, 제대로 즐겨보려고 에뮬로 돌려봤다. 이식된 기종 중 가장 고성능인 X68000판으로 시작했으나 PC9801판과 견주어 화면이 어두운 관계로 그냥 PC9801판으로 했다.

스토리는 주인공이 등굣길에 명문고 학생 코엔지 루리를 보고 반해서 그녀를 공략하는 게 목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여자마다 좋은 시간을 보낸다.

여자들은 주인공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너무 쉬워서 판타지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여자 후리고 다니는 남자들의 판타지.
이 게임에서 여자는 성적인 대상일 뿐이고 뇌가 없는 것 같다.

화면에 나오는 명령어를 한 번 이상 클릭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때가 많다. 주의할 점은 게임 오버 구간이 몇 개 있다. 옥상에서 여학생과 같이 담배 피우다든가, 제과점에서 종업원을 덮친다든가 하다가 걸려서 게임 오버를 보게 된다.

스토리는 어린 시절, 일본어를 모르고 했을 때 추측한 내용과 별로 빗나가지 않았다. 그만큼 별것이 없다. 불량배를 해치워준 주인공에게 코엔지 루리가 넘어오고 호텔 가서 즐기는 것으로 엔딩이다. 1편과 마찬가지로 스태프롤 같은 건 없고 달랑 해피 엔딩 한 줄 나오고 끝.

일본 국내에서는 수많은 에로 게임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한국에선 처음 퍼진 일본 에로 게임이라는 점 때문에 기념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을 보낸 소년들에게 추억거리다.

2022-10-16

천사들의 오후 1

1985년에 쟈스트가 일본의 8비트 컴퓨터 PC-8801용으로 내놓은 성인 어드벤처 게임.
우리나라에는 천사들의 오후 3 번외편이 DOS 시절에 여기저기 퍼져서 유명하지만, 그 첫 편은 PC-8801로 나와서 인지도가 없다.

옛날 게임인지라 그림 하나 뜨면서 색칠하는 게 다 보일 정도로 느리지만, 미소녀 도트 그림체가 괜찮아서 해보게 되었다. M88 에뮬로 잘 돌아간다.

진행 방식이 원시적이다. 명사(이름 또는 물건)+동사 조합으로 명령어를 키보드로 직접 입력해야 한다. 일본어 로마자 입력인데, ん은 wi로, -는 wu로 입력한다. 이게 난해한 게 그 장면에 맞는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된다. 정답은 하나뿐이다. 따라서 공략 없이는 엔딩 보는 게 거의 불가능 수준이다.

고등학교 테니스부에 소속된 유미코는 모든 남학생이 넘보는 미소녀다. 여자친구 쿠미에게 싫증난 주인공은 유미코를 노린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여자를 건드리지만, 이 게임의 목표는 유미코와 호텔에 가는 것이다.

주인공이 여성을 범하는 장면은 강간에 가깝다. 개연성 없이 ‘여자 이름+범하다(おかす)’ 명령어만 입력하면 그렇고 그런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여동생과도 그럴 수 있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들이닥쳐서 게임 오버 된다. 친구 여자친구를 3회 이상 범해도 게임 오버, 러브호텔 갈 돈을 다 잃어도 게임 오버.

공략 보고 명령어만 제대로 입력하면 40~50분 안에 게임이 끝난다. 선생과 교제 중이라는 유미코의 약점을 잡은 주인공은 결국 유미코를 호텔로 데려가는 데 성공하고 유미코를 여자친구로 만든다. 그리고 특별한 엔딩 화면 없이 게임 오버.

짧고 단순하면서 목적에 충실한 게임이다. 스토리에 개연성이고 뭐고 없고 수위는 높은 편.


엔딩 본 날 - 2022년 10월 16일

로맨싱 사가 1

로맨싱 사가 1편은 1992년 발매되었을 때, 그 전의 JRPG들과는 차별되는 요소로 주목을 받았다. 초반 스토리가 각각 다른 8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었고, 무엇보다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으로 자유도를 높였다.
90년대 초반까지 나온 JRPG들은 드래곤 퀘스트 방식을 교과서처럼 따르는 경우가 흔했는데, 불만이라고 한다면, 전개가 일방통행식이라 정해진 순서대로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로맨싱 사가는 그 점을 보완했다. 각 지역에 널려 있는 퀘스트 중에서 게이머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즐길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같은 게임을 즐겨도 게이머마다 시나리오 순서는 다 달랐다. 요즘 오픈RPG에선 흔한 방식이지만, 당시 일본의 RPG에선 드문 시도였다.

난 이것이 진정한 RPG라고 생각했다. 판타지 세상을 내 맘대로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의뢰를 받는다는 데 해방감을 맛봤다.
하지만, 당시 일본어가 미숙했던 나에게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은 진행하기 어려웠다. 시나리오 순서가 정해진 드퀘식 RPG야 공략 보고 따라 하면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지만, 이건 내가 진행하는 퀘스트가 뭔지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임챔프 같은 잡지에서 분석을 내주긴 했지만, 너무 부실해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전투만 반복하다가 결국 접었다. 그래도 오프닝 음악이 명곡이라 내겐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훗날 PS2 리메이크판인 민스트럴송으로 엔딩을 봤지만, 어릴 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게임 같았다. 아쉬워서 25년 넘게 지난 지금 에뮬로 다시 돌려봤다.

다시 해본 로사1은 너무나 불편했다. 일단 걷는 속도가 거북이인데, 적들이 빠르게 몰려드니 전투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무늬만 심볼 인카운터이지 랜덤 인카운터 수준의 전투 횟수를 피할 수 없었다. 엔딩까지 가는 데 일정 수준의 전투 횟수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제적인 전투를 부추겼다.
전투를 몇백 번은 되풀이해야 하는데, 전투 후 능력치가 오를 때 나오는 각 캐릭터의 동작은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어릴 땐 근사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플레이 시간을 어거지로 늘리는 것 같았다.

그 외에 장비를 해봐야만 무구의 수치를 알 수 있다든가, 던전 탈출 마법이 없다든가, 중요 대사도 평범하게 처리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옛날 RPG이니까 넘어가겠다.

이 게임이 막히기 쉬운 건, 지금 내가 받은 퀘스트가 뭔지 표시가 없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 힌트가 적기 때문이다. 요즘 RPG야 퀘스트 목록이 쭉 나열되고 가는 길도 친절히 알려주니 헤맬 일이 적은데, 이건 그런 게 없어서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퀘스트 진행 중에 중단했다가 며칠 뒤에 하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이 게임을 지금 한다면, 공략과 치트가 필수다. 내 경우는 4배로 빨리 걷는 치트, 전원을 앞 열로 보내는 치트, 적들을 일격에 죽이는 치트에다 에뮬의 빨리 넘기기 기능까지 썼다. 그래도 전투가 워낙 잦아서 던전 들어갈 때마다 부담이 됐다.

대사의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 캐릭터의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출신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대사를 종종 내뱉으며, 개연성 없는 대사도 많다. 그리고 퀘스트를 깨면, 감사의 말이 성의 없어서 성취감이 잘 안 든다. “따님을 구해왔습니다” 하고 가면, “아, 그래. 이게 보상이다. 그럼, 잘 가” 하는 느낌?

슈퍼패미컴 최고의 RPG 회사인 스퀘어 작품이라 당시 이 게임의 평이 좋은 줄만 알았다.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고 한다. 다시 해보니 단점이 많이 보여서 그럴만하다고 수긍했다.

이 게임은 일본인 능력자가 만든 확장 패치가 있다. 끝판왕의 동생인 세라하(셰릴), 데스를 주인공으로 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셰릴 패치’가 있길래 그걸 적용해서 했다. 셰릴이나 데스를 선택하고 특정 조건을 채우면, 끝판왕이 바뀐다고 한다.
하지만, 중반까지 진행하다가 불편한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고 전투 횟수를 치트로 960회 이상으로 올려서 끝판왕에게 바로 갔다.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개조된 내용이 아닌 오리지널 엔딩이 나왔다.

로맨싱 사가의 초기작은 조잡한 부분이 많은 B급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편에서 안주보단 도전을 선택했기에 2편, 3편 같은 명작이 나온 것이다. 시스템적으로 JRPG 역사에 남을만한 게임이라고 본다.

지금 즐긴다면, 슈퍼패미컴판 원작보다는 리메이크판 민스트럴송을 권한다.


엔딩 본 날 - 2022년 10월 15일

2022-10-14

와일리 & 라이트의 록 보드 - 뎃츠 파라다이스

록맨 캐릭터를 활용한 보드 게임. 패미컴 말기인 1993년에 나와서 그런지 록맨의 유명세치고는 소리소문 없이 묻히고 말았다.

5명의 캐릭터 중 한 명을 골라 주사위 숫자만큼 보드 위를 돌아다니며 부동산을 사들여 최고 자산가가 되는 걸 목표로 한다. 아쉬운 건 5명 중에 록맨은 없다. 록맨은 해설자 역할로만 나온다. 최고 인기 캐릭터가 없다니 맥 빠진 느낌이다. 굳이 아낄 필요가 있었을까.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그곳에 경쟁자가 들어오면, 돈을 받는다는 기본 규칙은 모노폴리, 부루마불과 똑같다. 중간중간 변수를 만드는 건 카드, 교섭, 사고, 도박 등이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땅을 선점하는 게 중요한데, 실력보다는 주사위 운에 달렸다. 운빨이 승패를 결정짓는다.

랏슈는 워프시킬 때 등장하고, 특정 조건 만족 시 거츠맨, 쉐도우맨, 더스트맨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런 식 말고 록맨과 함께 플레이어로 등장시켰으면 흥미롭지 않았을까.

진 엔딩 조건은 좀 까다롭다. 메트로폴리스 지도와 배틀로열 규칙을 선택해서 시작한 뒤, 상대편을 모두 파산시켜야 볼 수 있다. 스태프롤 나오고 마지막에 록맨이 얼굴을 비추고 끝난다.

그래픽은 깔끔하지만, 게임은 특별한 임팩트 없이 평이하다. 록맨다운 스토리를 넣고 록맨과 적 로봇들을 다 등장시켰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보드게임 특성 상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면 좀 나을지 모르겠다.


엔딩 본 날 - 2022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