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0

드래곤 퀘스트 4 리바스트의 전설

<드래곤 퀘스트 4 리바스트의 전설>은 ‘이케가미 지로’라는 일본인 능력자가 RPG만들기2000으로 만든 <드래곤 퀘스트 4>의 프리퀄이다. 드퀘4 시대로부터 수백 년 전을 다루며 아리나 공주의 조상으로 추측되는 산트하임의 왕자가 주인공이다.

1990년에 <드래곤 퀘스트 4 알려지지 않은 전설>이라는 소설이 출판된 적이 있는데, 그 스토리의 일부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드퀘4의 맵이 그대로 사용되며, 마을들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드퀘4의 마족왕 에스타크가 여기서도 나온다. 그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게 주인공의 목적.

개인이 저작권자 허락 없이 만든 외전 게임이라 현재는 배포 링크가 사라졌고, 대신 한글판만 남았다. 

이 게임을 한글 윈도우에서 실행하면, 일본어 글자가 깨져서 나오기 때문에 Locale Emulator를 설치해서 실행해야 일본어가 제대로 나온다. 그리고 4대3 비율이 아닌 요즘 모니터에서 전체 화면으로 하면, 옆으로 퍼져 나오는 문제가 있기에, 내 경우는 Magpie라는 유틸을 이용했다. 이걸 실행한 뒤, 게임에서 Alt+F11을 누르면, 4대3 비율을 유지한 채 전체 화면이 된다.

처음엔 에닉스 공식 작품도 아니고 팬이 만든 게임이라 큰 기대 없이 했다. 그런데 웬걸, 예상 밖의 완성도에 놀랐다. 드퀘4 패미컴 원판의 그래픽과 음악을 그대로 재현해서 옛 감성을 자극했다. 드퀘4의 명곡들이 즐비하다. 추억에 잠긴 나는 홀딱 빠져서 마구 달렸다. 

기본적으론 패미컴 드퀘4와 시스템이 같지만, 편한 요소를 추가했다. 드퀘5처럼 버튼 하나로 말걸기&조사를 할 수 있고, 세이브도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걸음 속도를 빠르게 조절할 수 있어서 쾌적했다. 전투가 랜덤 인카운터 방식이어도 빨리 진행할 수 있었다.

대사, 스토리, 설정 등을 보면, 제작자가 드퀘4를 덕후 수준으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만들었음을 느낄 수 있다. 드퀘 시리즈가 아닌 듯한 이질감이 전혀 없었다. 정식 드퀘 시리즈에 넣어도 무방할 정도다.

드퀘4의 지역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공략 방법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 라이안의 고향 바트랜드는 이 작품에선 아직 건국되기 전인데, 어떤 연유로 나라가 만들어졌는지 볼 수 있어 깨알 재미가 있었다.

스토리는 매우 드퀘답다. 왕도물이지만 약간씩 비트는 호리이 유지식 센스가 살아 있다. 다만, 몇몇 부분은 ‘어른들의 사정’이 이야기에 들어가 있다. 패미컴 전성기 시절 드퀘를 했던 어린이들은 지금 다 성인일 테니 이해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비극적이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것이 어른들의 세계.

리바스트는 천공의 피를 이어받은 전설의 용자이고, 이 게임의 부제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은 그가 아니라 산트하임의 왕자인 점이 특이하다. 예상과 조금 다른 전개가 재미있었다.

다음에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막히는 부분이 중간중간 있었다. 고전 RPG의 난해함까지 재현한 모양. 일본 사이트에 간략한 공략이 있길래 그걸 보고 시간을 절약했다.

끝판왕 에스타크는 천공의 검을 먼저 도구로 써야만 공격이 통한다. 이걸 몰라서 장시간 헛수고를 했다. 

엔딩 보는 데 대략 30시간은 걸릴 정도로 대작이다. 엔딩 후에는 더 강력한 보스 찾기가 기다리고 있다. 엔돌 성의 숨겨진 방에서 얻을 수 있는 전기밥솥이 있으면, 몬스터 도감을 만들 수 있고, 도감을 100% 완성하면, 마스터 드래곤 등 강력한 보스와 만날 수 있다.

처음엔 팬메이드 게임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해보고 완성도에 놀랐다. 만일 패미컴 시절에 이게 나왔다면, 패미컴 최고의 RPG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드퀘 천공 시리즈를 그 시절에 재밌게 즐겼던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엔딩 본 날 - 2022년 8월 30일

2022-08-28

듀얼 오브 2 한글판

1994년에 I'MAX가 발매한 슈퍼패미컴용 RPG. 전작이 성공하지 못했는데도 꿋꿋하게 1년 만에 후속작을 냈다.

전작이 드래곤 퀘스트 모방이었다면, 이번엔 파이널 판타지 모방 같다. 캐릭터 동작과 표정을 보면 파이널 판타지 5, 6이 자주 떠오른다. 게임에 등장하는 ‘오브’도 파이널 판타지의 크리스탈을 따라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전투 화면은 차별화하려고 신경을 썼다. 전작과 달리 우리 편 모습이 보인다. 다만, 주인공은 미성년자인데, 전투 화면만 보면 무슨 아저씨 전사처럼 보인다. 필드에선 귀여운 캐릭터들이 전투 화면에선 리얼한 모습이니 이질적이다.

12메가비트였던 전작보다 2배 늘어난 24메가비트 용량을 썼는데, 이는 슈퍼패미컴 RPG로선 꽤 고용량이다. 파이널 판타지 6과 용량이 같다. 그래서 그런지 전작보다 크게 향상된 모습을 보여준다. 전작의 성들은 왕이 있는 곳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았고, 건물 그래픽이 획일적이었는데, 이제 보는 맛이 생겼다.

난 이 게임을 1995년인가 1996년 즈음에 슈퍼패미컴+UFO로 즐긴 적이 있다. 파판 아류작이라는 느낌이 너무 들어서 중도에 그만뒀다. 그래도 오프닝이 박력 있었고 만듦새가 나쁘지 않아서 언젠가는 다시 해보려고 했다. 미루다가 이제 엔딩까지 달린 것이다.

B급 RPG이지만, 당시 게임 잡지에서 공략도 해줘서 한국에서 인지도가 좀 있는 편이었다. 나처럼 추억이 있는 사람 중에 능력자가 있는지 한글 패치까지 나왔다. 비공식이지만, 번역이 나쁘지 않았다. 글꼴이 굵어서 읽기도 편했다.

스토리는 전작과 이어지는 부분이 없다. 1편에선 과학 기술이 발달한 선조를 멸망시킨 존재가 드래곤이었지만, 2편에선 박사였다. 1편과 2편은 그냥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밋밋했던 전작과 달리 파티 멤버들이 자기 주장을 하며 색깔을 드러내며 다음에 뭘 할지 제언하기 때문에 알기 쉽고 템포가 좋다. 다만, 주인공은 한 마디도 안 한다.

오프닝부터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주인공과 히로인의 정체가 후반부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흔한 소재라 놀랍거나 하진 않았다. 중세 판타지 배경에 SF 요소를 넣은 점은 취향에 맞았다.

전투 밸런스가 묘하고, 적 조우율이 높다는 전작의 문제가 그대로인 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수작으로 평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발전한 속편이라고 본다. 단지, 파이널 판타지를 교본으로 삼고 만들었다는 인상이 짙은 게 흠이라고 할까. 결국 이 시리즈는 2편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한다.

제작사 I'MAX는 90년대 일본식 장기, 쇼기 게임 시리즈를 주로 내던 회사였다. 당시 RPG 제작을 안 해봐서 불안했는지 드래곤 퀘스트5, 파이널 판타지 6을 열심히 분석해서 따라 만들었다. 1990년부터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던 이 회사는 1998년을 끝으로 도산하고 만다.


◇사족 (스포&추측 포함)

1편과 2편은 서로 관련 없는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끝 부분에 나온 보스의 모습이 드래곤인 걸 보니 이렇게 엮어보고 싶다.

-1편에서 드래곤은 인간 위에 신처럼 군림하고 있었는데, 인간들이 생명을 창조하는 기술을 개발해내자 위협을 느낀 드래곤이 인간 문명을 파괴해 버린다. 그리고 인간 세상은 중세 시대로 문명이 퇴보한다.

-2편에서 주인공 친구는 힘을 갈구한 끝에 사악한 박사에게 강한 몸을 얻는다. 그 몸은 진화해서 드래곤이 된다. 드래곤은 주인공에게 패배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숨을 거두지만, 사실 죽은 게 아니라 오브의 힘으로 봉인되었을 뿐이다. 먼 훗날, 봉인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된 드래곤은 인간 위에 신처럼 군림한다. 이 드래곤이 1편의 드래곤이다.

이렇게 상상하면, 2편이 1편보다 앞선 시간대를 그린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제작자가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2편이 대성공을 거둬 후속작이 나왔다면 이런 식으로 엮을 수도 있었겠지. ㅎㅎㅎ


엔딩 본 날 - 2022년 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