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엘나드


1993년 4월, 에닉스가 슈퍼패미컴으로 발매한 RPG.
엘나드라는 세상에서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현자, 지다는 7명의 용사 유망주를 직접 발탁한다. 5년 동안, 그들을 가르치고 키운 지다는 그들에게 세상에 흩어져 있는 '아크' 7개를 모두 찾아 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아크'란 세상을 이끌 힘이 깃든 보석이다. 7개의 아크를 다 모은, 오직 한 명에게만 그 강대한 힘이 가기에 7명은 따로 행동하며 경쟁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7명의 전사 중 한 명을 선택해 시작한다. 이 7명은 종족이 달라 개성이 강하다. 인간 검사, 인간 신관, 철인, 드워프, 엘프, 악마, 에이리언이다. 한 명을 주인공으로 선택하면 나머지 캐릭터들은 중간에 동료가 되거나 적이 된다. 그리고 멀티 엔딩은 아니지만, 주인공에 따라 플레이 루트가 조금 달라진다.


나는 철인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철인은 5000년 전의 문명이 남긴 로봇이다. 다른 캐릭터와 달리 장착할 무기와 방어구가 없다. 후반부까지 상점을 이용할 일이 없다는 점이 되려 편해 보여서 선택했다. 로봇이라서 걸을 때 쇳소리가 난다.


이 게임의 첫인상은 일본 게임이 아니라 서양 게임 같다는 것이다. 패키지 일러스트와 달리 분위기가 칙칙하고 디자인도 양키 센스에 가깝다. 어둡고 암울한 인상이다. 이 게임이 눈에 띄지 못했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맵은 광활한 편이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먼 편이라 오래 걸어야 한다. 특이하게도 레이더가 있어서 마을, 몬스터, 보물상자, 아크가 있는 곳이 다 표시된다. 따라서 헤맬 일이 없었다. 더구나 한 번 간 곳은 초반에 얻는 바람의 아크로 워프할 수 있기 때문에 편했다.


마을에서 같이 수행했던 캐릭터들이 랜덤으로 등장한다. 말을 걸면 동료가 되기도 하고 싸움을 걸어오기도 한다. 싸움에서 지면 그때까지 모은 아크를 전부 빼앗긴다. 그럼 어떻게든 다시 싸워 이겨야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동료는 딱 한 명만 데리고 다닐 수 있는데, 같이 싸워주기도 하지만, 배신하기도 한다. 다른 RPG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시스템이다.




다른 시스템은 옛날 RPG답게 불편한 편이다. 말을 걸거나 조사할 때 창을 불러서 선택해야 한다는 점, 아이템 정돈도 안 되고 설명이 없다는 점이 그렇다. 그나마 상점에서 무기를 살 때는 상점 주인이 그거 장착하면 수치가 얼마나 내려가고 올라가는지 알려준다.



전투는 흔한 드래곤 퀘스트식인데, 명중률이 낮고 혼자 아니면 둘로 싸워야 하므로 어려운 편이다. 물론, 레벨을 왕창 올려두면 쉬워진다.



캐릭터들은 개성적이지만, 대사가 거의 없다. 주인공은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나머지 라이벌들만 조금 대사가 있는데, 성격이 많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다. 감정 이입은 거의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임의 분위기가 시종일관 우울하다. 쓰러뜨려야 할 어떤 보스는 불행한 사건으로 미쳐버린 피해자라서 죽여도 통쾌함은커녕 뒤끝이 안 좋다.


스토리엔 반전이 있어서 좋았다.
<스포일러>
주인공이 7개의 아크를 모두 모은 시점에 스승이었던 지다가 정체를 드러낸다. 진짜 지다는 5년 전에 죽었고, 그는 어둠의 왕 고시아가 둔갑한 것이었다. 그가 지다 행세를 하며 주인공들을 수행시키고 아크를 모으게 한 까닭은 5000년 전 신에 의해 7개의 아크에 각각 봉인된 자신의 힘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주인공의 아크를 파괴하고 모든 힘을 되찾은 고시아. 고시아는 자신을 봉인했던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5000년 전의 과거로 간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도 함께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5000년 전의 과거로 간 고시아가 자신의 힘을 봉인했던 신을 쓰러뜨리자 세상 사람들은 멘붕에 빠진다. 죽기 직전의 신을 만난 주인공은 그가 남긴 아크를 받고, 그 힘을 이용해 고시아와 마지막 싸움을 벌인다. 격전 끝에 고시아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 주인공. 그러나 고시아는 언젠가 부활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주인공을 죽음의 길동무로 만든다.


몸이 산산조각 난 주인공은 신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다. 신의 사제들은 아기로 돌아간 주인공을 안고 이름을 '지다'로 짓는다.
그 얘기는 주인공이 세상의 지도자 지다가 되고 5000년 뒤 부활한 고시아에게 죽는다는 것. 무한 루프다.

비슷한 건물 디자인 반복과 호불호가 갈리는 그래픽 등 단점이 많은 RPG지만, 후반부 전개는 강렬했다. 충격의 반전과 엔딩인데도 그걸 너무나 담담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이 게임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론 후일담 없이 짧게 끝나서 아쉬웠다.

만일 에닉스가 드래곤 퀘스트 만드는 정성으로 이 게임을 만들었다면, 왕도물인 드퀘와 반대편에서 쌍벽을 이루는 사도물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이 게임을 만든 스태프는 브레인로드(1994년), 미스틱아크(1995년), 미스틱아크 환상 극장(1999년)을 만들었다. 이 게임들에서도 7개의 아크가 나온다. 스토리는 이어지지 않지만, 일부 지명과 인명을 공유한다고 한다.

전형적인 JRPG 노선과 다른 걸 원하는 분에게 이 게임을 권한다.


엔딩 본 날 - 2020년 8월 30일

2020-08-28

파이널 판타지5 GBA판


1992년에 슈퍼패미컴으로 나왔던 명작을 2006년 10월 휴대용 게임보이 어드벤스로 이식해서 발매했다.
슈퍼패미컴판에서 바뀐 점은 다음과 같다.
-오프닝에서 레나의 묘사가 조금 더 나옴.
-대사를 히라가나만 나오게 하거나 한자와 섞어서 나오게 할 수 있다(선택 사항).
-상대했던 몬스터를 볼 수 있는 몬스터 도감 추가.
-시프 캐릭터가 없어도 마을과 던전에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시프 캐릭터가 파티에 있으면 달리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
-전투 배경, BGM 다소 변화. BGM 음질은 슈패판보다 못하다는 평이 많다. 그래서 사운드 개선 비공식 패치도 있다.
http://www.romhacking.net/hacks/563/


게임챔프 1993년 2월호 별책부록에는 슈퍼패미컴용 파이널 판타지5의 45쪽 특별 공략이 실려 있었는데, 난 그게 너무나 재미있어 보여서 슈퍼패미컴을 사면 꼭 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여건 상 6편이 나온 뒤에나 해서 좀 김이 빠졌다. 그래도 대단한 게임이라고 느꼈다. 운석이 떨어지는 장면이나 지역이 확대 축소되는 장면은 당시 기준으로 스펙타클하게 느껴졌다.


GBA판으로 다시 클리어할 생각까진 없었는데, 실행만 해본다는 것이 어느덧 빠져들어 엔딩까지 달리고 말았다. 몇 달 전에 다시 해본 3편의 느낌이 고스란히 담겼고, 아기자기한 그래픽이 향수를 자극했다. 기기 성능의 한계 안에서 최대치를 끌어낸 RPG가 아니었나 싶다.


3편 느낌이 물씬 나는데, 그 중심은 잡시스템이다. 더 많은 직업과 어빌리티를 볼 수 있고, 키우는 재미가 있다. 4편과 6편에선 이 시스템을 채택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스토리는 왕도물이지만, 장렬히 죽는 인물이 꽤 나오고 월드맵이 바뀔 정도의 변화가 있는 등 전개에 굴곡이 있어서 흥미롭다. 캐릭터의 개성도 잘 드러내고 있다. 후반부에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석판과 무기를 찾아야 하는데, 공략 순서를 게이머 자유에 맡기는 점도 좋았다. 숨겨진 보스, 마법, 소환수 등 파고들 요소가 많다.
드래곤 퀘스트처럼 워프 마법이 없어서 길 찾을 때 좀 불편한데, 이건 월드맵을 음미하게 하려는 제작자 의도라고 한다.


상당히 방대한 게임이다. 이 작은 용량에 어떻게 다 구현했는지 그 세밀함과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음악도 다 명곡이다.


다시 해보니 역시 걸작 RPG임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엔딩 본 날 - 2020년 8월 28일

2020-08-24

정령신세기 페이에리어


1992년, 울프팀에서 메가CD용으로 발매한 RPG. 메가CD 초기에 나와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오프닝은 일단 거창하게 시작. 음악도 괜찮았다. 오프닝 후반부에 캐릭터 4명이 함께 달리는 모습이 어설퍼서 웃기긴 했지만.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나는 베드신으로 시작된다. 어머니가 깨운다. 왕도 RPG에서 흔한 모습이다. 마을의 배경음악은 음성이 코러스로 들어가 있고, 듣기 괜찮았다. 그래픽도 깔끔한 편이라 계속 해볼 마음은 들었다.


왕녀가 주인공 레이첼이 사는 마을로 방문한다. 왕녀는 주인공이 전설의 정령 기사 자손이라며 마족들로부터 세상을 구해달라고 한다. 왕녀는 히로인인 줄 알았더니만, 초반에 납치당한 걸 구해주면 그냥 성으로 돌아간다. 동료로 합류하지 않는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3명과 차례로 만나 함께 모험을 한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전투에서 애니메이션 효과가 있다며 선전했지만, 작은 화면에 컷만 바뀔 뿐 애니메이션까진 아니었다. 그리고 적 조우율이 높아서 괴롭다. 초반에 디버그 모드로 들어갈 수 있는 비기가 있는데, 레벨을 올리거나 전투를 없앨 수 있어서 재미는 없겠지만, 쾌적하게 진행할 수 있다. 워프 마법이 있어서 마을 간 이동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스토리는 너무 밋밋하다. 굴곡이 없고 개연성도 부족하다. 주인공이 가진 반지에 끼울 3개의 보석을 찾아 고대마법을 부활시키고 끝판왕을 물리치면 끝난다. 플레이 시간 대부분은 레벨업이고, 이야기는 짧다.


제작사 울프팀은 그래픽, 음악 같은 겉치장에만 힘을 쓰고, 정작 스토리나 시스템은 소홀히한 인상의 게임이 많다. 잡지의 게임 소개만 보고 대작인 줄 속아넘어가기 좋았다. <정령신세기 페이에리어>도 그런 게임 중 하나였다.


엔딩 본 날 - 2020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