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30

아쿠탈리온

B급스러운 게임 일러스트

1993년 11월 5일, 테크모가 슈퍼패미컴용으로 내놓은 RPG. 테크노는 과거 패미컴용 <닌자용검전>과 <캡틴 츠바사>로 이름을 떨친 제작사였으며, RPG는 패미컴용으로 발매한 <라디아 전기>에 이어 <아쿠탈리온>이 두 번째였다.

영문판 일러스트

발매한 달에 슈퍼패미컴에서 특별한 대작 RPG가 없었는데도 인지도가 낮은 걸 보면, 판매량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해외에선 영문판(Secret of the Stars)이 발매된 덕인지 나름 팬이 있고,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패치도 있다. 참고로 에뮬에서 영문판 세이브 파일은 일본판에도 호환이 된다. 단, 등장인물명이 영문으로 바뀌어 나온다(일본판에서 영문 이름 입력은 불가능).


이 게임이 출시된 1993년은 <성검전설2>, <가이아 환상기>, <로맨싱 사가2>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게임은 패미컴 게임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래픽이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패미컴 게임보다 색상이 좀 추가된 것뿐이었고, 대사도 한자 없이 히라가나로만 나온다. 그런데도 이 게임을 한 것은 슈퍼패미컴에서 패미컴 감성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치를 대폭 낮추고 시작했다.


양친 없이 양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주인공은 어떤 여행자에게서 "네 아버지는 위대한 아쿠탈리온이었어. 세계 정복을 노리는 호문쿨루스와 싸웠지. 그 호문쿨루스가 부활하려고 해. 어서 네 아버지 유품인 별의 문장을 찾아서 너도 아쿠탈리온이 되어 호문쿨루스와 싸워라"라는 말을 듣는다. '아쿠탈리온'이란 전설의 용사 파티를 뜻하는 것 같다. 용사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로 구성된 파티를 '아쿠탈리온'이라고 하고, 그를 돕는 어른 파티를 '쿠스테라'라고 한단다.
고분고분한 주인공은 악당 호문쿨루스와 싸우기 위해 아쿠탈리온의 자손들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전형적인 드퀘식 JRPG이지만, 특별한 점이라면, 동료가 늘어난 뒤, 파티를 둘(아이조, 어른조)로 나누어 아무때나 번갈아가며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파티를 둘로 운영해봤자 이점이 없다. 오직 마지막 던전에서만 의미가 있다. 거기서만 두 파티를 번갈아 진행해야 넘어갈 수 있다.


전투에선 합체 공격이 있는데,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른 중반 이후 레벨업도 미묘하다. 평균 300 정도 경험치가 들어오는데, 다음 레벨업까지 무려 20000~30000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시스템 완성도가 떨어지고, 속도도 느린 편이다. 마이너 게임답다.


게임 진행하면서 여러 번 막혔다. 80년대 RPG도 아니면서 힌트가 부실하고 불친절하다. 가령 적의 숨은 아지트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어떤 힌트도 없이 평범한 집의 침대 아래에 있다든가 건물 진입에 꼭 필요한 다이너마이트를 벽에 가려 안 보이는 NPC가 팔고 있다든가...... 다음에 갈 장소도 명확한 위치가 아니라 지명만 알려주는 경우가 꽤 있다. 공략 안 보면 헤매다 게임 포기할 지경이다.


게임 세계관은 중세 판타지물보다는 SF에 가깝다. 중후반에 첨단 과학 기술이 등장한다. 옛 일본 느낌의 마을도 나오고 닌자, 사무라이 같은 동료도 나온다. 이것저것 뒤섞은 세계관이다.


다른 요소에 견주어 음악은 나쁘지 않았다. 잔잔하니 무난했다. 스토리는 연출이 너무 소박하고 뭐가 중요 대사인지 알 수 없게 해놔서 머리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이 게임 해볼 사람이 없을 듯해서 스포일러를 쓴다.


◆스포일러◆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당 호문쿨루스는 원래 인간이었는데, 어떤 미친 박사에게 어린 시절 유괴되어 인조인간으로 개조 당한다. 그 때문에 인간을 증오하게 된 호문쿨루스는 박사를 죽이고, 박사가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간다. 미래에서 고도의 과학기술을 섭렵한 호문클루스는 다시 원래 시대로 돌아와 세계 정복을 노린다. 미래에서 호문클루스를 가르쳤던 유다는 호문클루스의 야심을 뒤늦게 알고 5명의 전사 '아쿠탈리온'을 과거로 보낸다. 호문클루스는 아쿠탈리온에게 저지당하지만, 십수 년 후 부활한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쿠탈리온의 자식들뿐이었다. 그 피를 이어받은 주인공은 다른 아쿠탈리온들을 모아서 결국 호문클루스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자신들이 미래인의 자식임을 알게 된 주인공 일행은 미래로 갈 수 있었지만, 살던 곳에 남는 것을 선택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RPG 제작에 경험이 일천한 테크모가 만들어서 그런지 여러 모로 역량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스토리는 그리 나쁘진 않았다. 캐릭터들에 성격을 넣고 더 세심하게 만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테크모는 이 뒤로 턴제 RPG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내 평점은 5점 만점에 1점.


엔딩 본 날 - 2020년 1월 30일

2020-01-28

아라비안 나이트 사막의 정령왕


1996년, 판도라박스가 개발하고 장난감 회사 타카라가 발매한 슈퍼패미컴용 RPG.
중세 유럽 판타지 배경이 주류인 JRPG에서 드물게도 아라비아풍 세계를 채택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전개가 바뀌는 점이 특징. 슈퍼패미컴 말기에 나온 작품인지라 인지도는 무척 낮다.


이프리트는 '진'이라고 부르는 정령들의 왕이었지만, 대마법사 슬레이만에게 마력을 봉인 당하고, 1000명의 소원을 들어줘야 해방이 되는 저주에 걸린다.
몇백 년이 흐른 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이모 밑에서 힘들게 자라온 소녀 슈크란은 길가에서 우연히 반지를 줍는다. 그 반지엔 정령왕 이프리트가 봉인 되어 있었고, 이프리트는 반지 주인이 된 슈크란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슈크란은 이프리트가 소원을 들어줘야 할 1000명째 인간이었고, 그것만 해내면, 이프리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착한 슈크란은 남들처럼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세상이 평화로워지게 해달라'는 의외의 소원을 빈다. 결국 이프리트는 내키지 않지만, 슈크란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해 마물들을 소탕하러 나선다.


기본 시스템은 전형적인 턴제 JRPG이지만, 전투에 다양한 결계 카드를 쓸 수 있고, 이벤트를 통해 찾아낸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다. 전투 화면은 쿼터뷰를 채택했고, 단 3명의 파티로 끝까지 진행된다. 주인공 슈크란이 쓰는 '일기'라는 항목엔 이벤트를 진행할 때마다 내용이 추가된다. 일기에 공백이 있으면 아직 할 게 남았다는 얘기.


필드에서 적 조우율은 높은데, 걸음 속도가 느려서 답답하다. 다만, 초중반쯤 나오는 아기 새에게 10000냥어치 아이템을 먹여 키우면, 이동수단으로 쓸 수 있다. 새를 타면, 전투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 워프 마법이나 아이템이 없어서 던전 보스를 물리친 뒤, 나올 땐 좀 불편하다.


중동 배경이라 필드는 사막이 많고, 마을의 여자들은 히잡을 두르고 있다. 중세 유럽 배경 JRPG와 달라 신선하긴 하지만, 비슷한 모습의 마을이 많아서 조금 답답한 감은 있다. 여관에선 불쌍한 이들을 위해 기부를 할 수도 있는데, 50번 하면, 무기를 받을 수 있다.


게임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선 굵은 그림체가 마음에 든다. 주인공 슈크란은 이프리트와 대비되게 순수하고 착하다. 자주 넘어지는 점이 재밌다.


본편 이야기는 아주 짧다. 10시간 아래로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을 몇 개 거치고 적의 아지트 들어가서 끝판왕 잡으면 엔딩이다. '이게 끝이야?' 했다. 그런데, 진엔딩이 따로 있다. 진엔딩을 보려면, 중반 이벤트에서 두 가지 답변이 무척 중요하고, 이프리트의 과거 부하들을 이겨서 모든 마보(魔宝)와 마수정(魔水晶)을 얻어야 한다. 필수 이벤트보다 서브 이벤트가 더 많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RPG라고 할 수 있다.


진엔딩 루트에선 이프리트의 본모습을 볼 수 있고, 최종 던전과 진짜 끝판왕이 나온다. 그리고 일반 엔딩보다 좀더 긴 대사들이 나온다. 개인적으론 일반 엔딩 쪽 결말이 너무 간단하긴 해도 더 여운을 주지 않나 싶다.


스토리, 설정, 캐릭터, 일러스트 다 좋은데, 게임을 너무 짧게 만들었다는 인상이다. 슈퍼패미컴 시대가 끝나려 하는 시기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하고 후다닥 마무리해서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더 일찍 기획해서 볼륨을 키웠더라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요소가 나쁘지 않았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RPG.


엔딩 본 날 - 2020년 1월 28일

2020-01-26

대패수 이야기 2


전작이 나온 지 2년 다 되어가는 1996년 8월에 슈퍼패미컴으로 나온 속편이다. 1편의 경우엔 90년대 우리나라에서 해본 분이 꽤 있지만, 2편의 경우는 슈퍼패미컴 시대가 저물고 플레이스테이션을 비롯한 차세대 게임기가 득세하던 시절이라 묻힌 감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1편보다 2편이 더 궁금했다.


평화를 되찾은 환대륙 쉘도라도에 다시 위기의 조짐이 보인다. 쉘도라도 밖의 세상에서 날아온 비룡 드래곤버드가 상처입은 몸으로 패수(貝獣) 마을에 떨어진다. 드래곤버드를 타고온 기사 루카는 500년 전 봉인된 암흑마도사 다크가 부활했음을 알리고 숨을 거둔다. 다크의 목적은 오라 스톤(1편의 오라 구슬)들을 모두 모아 막강한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를 직감한 패수 마을의 선인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불의 조개 용사를 소환한다. 이 용사는 전작에서 활약했던 중동 소년이 아니고 보통의 현시대 소년이다. 소환에 문제가 생겼는지 소년의 반려견만 패수 마을로 떨어지고 주인공 소년은 다른 지역으로 떨어진다. 게임은 이 주인공 소년과 그를 찾아 도우려는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주인공은 달라졌지만, 먹는 것만 밝히는 푸욘 등, 전작의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래픽이 전작보다 조금 나아졌으며, 시스템도 더 편리해졌다. B 버튼 빨리걷기가 없어진 대신, 옵션에서 걸음 속도를 빠르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추가된 요소로는 <천외마경 ZERO>에서 도입되었던 퍼스널 라이프 게임 시스템(PLGS)의 탑재다. 시작할 때 현실 시간과 플레이어 생일을 입력하면, 게임에서도 그 시간이 반영되고 생일 등 특정 시간에 이벤트가 펼쳐지는 시스템이다. 각지에 있는 우물 등에서 이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다. 무시해도 게임 클리어엔 지장이 없지만, 특별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전작과 달리 파티를 둘로 나눠서 번갈아 가며 진행해야 하는 부분이 중반부터 꽤 된다. 파티 하나가 4명이라서 핵심 캐릭터를 키우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중반 이후엔 두 파티를 자유롭게 편성할 수 있다.


동료 캐릭터는 전작과 비슷하게 다양하지만, 동료 캐릭터의 과거 회상 등은 전보다 줄어든 느낌을 받았다. 전작처럼 숨어 있지 않고, 핵심 캐릭터 몇몇의 과거가 스토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스토리 진행과 상관 없지만 파고들 수 있는 서브 이벤트는 이번에도 다수 있다.


스토리에선 전작의 바이오베이스 던전 같은 잔혹한 부분은 없다. 지극히 평범한 왕도물로 나아간다. 다만, 죽음은 묘사된다. 일본 작품들은 조연 캐릭터가 목숨을 바쳐 모두를 구하는 걸 곧잘 미화하곤 하는데, 이 게임에서도 나온다. 옛날엔 그냥 그렇구나 했지만, 요즘은 불편하다. 자기가 죽으면 좋은 세상이 와도 뭔 소용인가. 게임에서 자기 목숨을 바칠 정도의 동기가 상세히 묘사되지 않았기에 더 공감이 안 갔다.
후반부 이변으로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지는 건 1편이나 2편이나 비슷하다. 어떤 이벤트 뒤, 마을에 자잘한 변화가 있는 디테일도 살아 있다.


난이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적 조우율이 높아서 성기시고, 끝판왕은 약점을 계속 바꿔대서 장시간을 요한다. 라스트던전에선 두 파티를 번갈아가며 해야 넘어갈 수 있는데, 공략 안 보면 쉽지 않다.


이 게임만 놓고 보면 슈퍼패미컴 RPG 기준으로 수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1편과 견주면, 1편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각 이야기의 연계성이 1편이 더 잘 짜여진 느낌을 받았고, 2편은 시나리오가 굴곡이 없어서 평범해 보였다. 분기가 있는 점은 좋았지만, 순서만 달라지는 정도다.

1편은 걸작, 2편은 수작으로 생각한다.


엔딩 본 날
2020년 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