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3

테일즈 오브 베르세리아 PC판


2016년에 PS3, PS4로 나와 2017년에 PC로 이식된 테일즈 시리즈 16번째 작품. 1995년 슈퍼패미컴으로 첫 작품이 나온 이래로 '테일즈' 뒤의 이름만 바꿔서 계속 속편이 나왔다.
첫 작품 <테일즈 오브 판타지아>는 당시 슈퍼패미컴 게임에선 드물게 오프닝송과 전투 시 성우 목소리가 나와서 큰 주목을 받았다. 난 당시엔 해보지 못했고, 훗날 PS1 에뮬로 클리어했는데, 스토리가 너무 왕도물이라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뒤로 테일즈 시리즈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테일즈 오브 베르세리아>는 테일즈 최초로 주인공이 섹시한 여성이라서 호기심에 시작했다.


PC판으로 했고, 비공식 한글화를 적용했다. 설정에서 전체 화면으로 바꾸면, 다음 실행시 플레이가 안 되는 문제가 있는데, 기본 설정인 테두리 없는 창 모드로 하면 해결된다.


초반 스토리는 인상적이었다. 변방의 마을에서 아픈 남동생을 돌보며 살던 소녀가 형부의 배신으로 남동생을 잃고 복수마가 된다는 내용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건 말건 오로지 형부를 죽이는 게 주인공 벨벳의 목적이다. 다정했던 성격도 그 일을 겪은 뒤 냉혹하게 바뀐다.


복수를 위해 감옥을 탈출하면서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데, 각자 목적은 다르지만, 같이 행동할 이유가 생겨 일행이 된다. 옛날 RPG처럼 무조건 정의를 위해 악과 싸운다가 아니라 왜 그런 언행을 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묘사된다. 주인공이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개인적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점이 다른 RPG 주인공과 차별되는 점이 아닐까 한다.
스토리는 암울하지만, 테일즈 시리즈 특유의 밝은 색감과 분위기 때문에 덜 무겁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론 더 암울하고 어두웠으면 했지만, 그럼 테일즈 시리즈가 아니겠지.


게임은 쉬운 편이다. 어디로 갈지 누가 중요한 대사를 하는지 지도에 다 표시가 되기 때문에 별로 헤멜 일이 없다. 서브 이벤트를 다 즐길 것 아니면, 표시된 부분 이외엔 안 가도 게임 진행엔 별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편하긴 하지만, 스스로 뭘 알아낸다는 재미는 잘 느끼지 못했다.


전투 시스템은 리얼타임 액션이 가미되었는데, 1995년 첫 작품에서부터 계승되어온 것이다. 풍부한 모션으로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밝은 색상 탓에 적 괴물들이 막 징그럽거나 공포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초반까진 스토리가 재미있었는데, 갈수록 진부해지고, 일본 특유의 교훈 주려는 면 탓에 흥미를 잃었다. 무겁게 시작한 스토리가 점점 가벼워진다고 할까. 일본의 소년 만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도 중후반까지 참고 하게 만든 건 캐릭터의 옷을 갈아입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출이 심한 옷으로 바꾸면, 눈이 호강한다. 제작사도 그걸 노린 것 같다.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꼬마 남자애와 함께 다니는데, 과거와 달리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바뀐 게 느껴진다. 남자애는 매우 수동적이고 보살펴줘야 하는 존재다. 여주인공 벨벳이 남자처럼 지켜준다. 개인적인 취향으론 남성적인 벨벳보다는 여성적인 엘레노아가 더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서로 주고받는 대사나 전개가 유치해져서 중후반까지 진행하고 끝판왕 직전 세이브 파일만 받아서 엔딩을 봤다. 후반부 내용을 생략하고 깼는데도 내용 이해에 별 무리가 없었던 걸 보면, 예측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게임의 만듦새는 별로 지적할 게 없지만, 스토리 부분에선 좀 아쉬운 감이 있다. 기존의 테일즈다움에서 좀 비틀긴 했지만, 대중적인 왕도물 속성을 벗어나진 못했다. 그것이 폭넓은 인기의 비결이겠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이런 소년 만화 같은 스토리엔 큰 인상을 못 받는다.
초반 스토리의 임팩트, 노출 있는 캐릭터의 의상만이 기억에 남는다.

엔딩 본 날 - 2019년 12월 22일

2019-12-11

영원의 피레나


1995년 슈퍼패미컴으로 발매된 RPG. 일본 잡지 <애니메쥬>에서 연재되던 판타지 소설을 게임화했다. 원작 소설은 슈도 타케시(2010년 사망)가 썼는데, <요술공주 밍키>, <우주전사 발디오스>, <포켓몬스터> 등의 작가이기도 하다.
피로세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16살 피레나는 여자인데도 검투사 제나에게 남자 검투사로서 길러졌다. 그 이유는 피레나가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나라의 왕녀이기 때문이다. 제국이 오락거리로 여는 검투사 대회에서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던 피레나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제국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곳곳을 다니면서 제국의 핍박에 항거하는 반란군과 함께 제국의 우두머리를 무찌르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이야기.


당시 RPG에선 보기 드물게 여자가 주인공이며, 조연 리라는 피레나가 여자임에도 남편처럼 따르는 것을 볼 때 동성애물처럼 느껴진다. 제국에게 정복당한 나라의 주민들은 '크레이타'라는 천한 계급 취급을 당하는데, 직업 선택과 출산의 자유가 없으며, 노예나 창부로 살아가야 하는 비참한 계급이다. 리나도 승리한 검투사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창녀이다. 가정용 게임기에서 창녀가 등장하는 건 처음 본다.


설정 자체가 미드 <스파르타쿠스>처럼 비장해서 처음에는 끌렸는데, 스토리가 예측 가능하고 적들도 매력이 없어서 3분의 1쯤 진행한 시점에서 끝판왕 직전 세이브를 받아 엔딩을 봐버렸다. 설정은 암울하고 비참한데, 그래픽, 음악, 대사가 그걸 살리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더 어둡고 묵직하게 전개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래픽은 <파이널 판타지4, 5>, 전투 시스템은 <에스트폴리스 전기>와 흡사한데, 그 게임들보다 뒤에 나왔음에도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소설을 시작으로 게임과 애니메이션까지 나왔지만, 제작사의 역량 탓인지 게임과 애니메이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도쿠마 쇼텐(徳間書店)에서 만든 게임치고 재미나게 한 게 없다.


히트한 타사 RPG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가져와서 냈지만, 너무 전형적이고, 설정의 독특함을 못 살린 RPG.


엔딩 본 날 - 2019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