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5

신성기 오딧세리아


1993년 6월 16일 빅동해가 내놓은 슈퍼패미컴용 RPG.
패미컴 RPG를 쭉 하다가 슈퍼패미컴 RPG로 넘어오니 시스템도 편리하고, 음악도 좋아져서 발전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L버튼 한 번 누르면 빨리 걷기로 전환되는 점이 편했다. 세이브도 아무데서나 된다.


시스템은 레벨업시 능력치 배분 같은 점을 빼면 드래곤 퀘스트와 거의 흡사하지만, 배경에서 흔한 판타지 RPG와는 차별점이 있다. 이 게임은 실존하는 지명이 등장하며 지형도 우리가 아는 세계 지도와 같다. 그리스, 로마, 이집트, 일본, 인도 등의 옛날 또는 전설 속 지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스토리는 세계 각지의 신화를 독자적인 해석으로 통합했다. 그리스 신화, 이집트 신화, 구약성서의 창세기, 인도 신화, 일본 신화, 무 대륙 등이 한 작품에 다 섞여 나온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천상계, 명계, 지상계를 만들었고 각각 신을 두었다. 그중 천상계의 신은 나머지 두 세계를 정복하려고 전쟁을 일으킨다. 지상계의 수호신 가디안들은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천상계의 신 천제에 의해 가디안들은 힘을 봉인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한 소녀가 가디안들의 봉인을 푸는 임무를 우연히 맡게 되며 펼쳐진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전투 화면부터 나온다. 적은 원숭이이고, 그것을 물리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용족이다. 용족 카일은 쓰러져 있는 주인공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시대는 빙하기인데,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건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 진화한 용족이었다. 소수의 인간들은 용족들에게 하등동물 취급당하며 원시인으로 숨어 살고 있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설정이 꽤 흥미롭다. 전생을 통해 빙하기→기원전 1300년→기원전 500년순으로 무대가 바뀐다. 초반부가 하드보일드하고 반전도 있어서 몰입했다. 하지만, 빅동해는 그리 믿음이 가지 않는 제작사다. 아니나 다를까 갈수록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세계관과 스토리는 참 흥미로운데, 이걸 풀어가는 방식이 산만해서 뭔가 집중이 안 된다. 동료로 들어오고 나가는 타이밍이 좀 느닷없다든가 설명이 난해하다든가 하는 점들이다. 히라가나 글씨체도 다소 가독성이 떨어진다. 치명적인 건 베타테스트를 제대로 안 하고 출시했는지 바다 위에서 전투하면 다운되거나 세이브 데이터가 날라가는 버그가 있다. 이 때문에 당시 평가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전투 화면은 꽤 인상적이다. 괴기스런 몬스터 그래픽, 움직이는 배경이 눈에 띈다. 몇몇 이벤트는 비극적이다. 분위기가 하드보일드하다. 죽음이나 노예에 대한 묘사, 여캐릭터의 임신 등을 보면 어린이보다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 같다. 잔혹한 살해 장면도 있는데, 그래도 가정용 게임기라서 그래픽으론 단순하게 처리되고 글로 어떻게 죽었는지 묘사된다.


세계관도 독특하고 음악도 좋은 편인데, 만듦새가 아쉽다. 이야기에 좀더 알기 쉽게 살을 붙이고 디테일에 신경을 더 썼으면 걸작이 나올 수도 있었다.


엔딩 본 날 - 2018년 2월 25일

2018-02-19

리디아 전기 여명편


<캡틴 츠바사>, <닌자용검전>, <스타포스>, <아르고스의 전사> 등 주로 스포츠와 액션 쪽 게임을 만들던 테크모가 처음 내놓은 RPG다. 1991년 11월에 패미컴으로 나왔는데, 이미 넉 달 전에 슈퍼패미컴으로 <파이널 판타지4>가 나오면서 패미컴은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게다가 <라디아 전기> 발매 일주일 뒤엔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까지 나왔으니 이 게임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제작사 테크모가 RPG 쪽엔 실적이 없던 점도 겹쳐서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이 되고 말았지만, 직접 해보면 평판보다는 괜찮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프닝 데모는 패미컴 수준에선 꽤 인상적이다. <캡틴 츠바사>와 <닌자용검전>의 제작사다운 비주얼신이다.


RPG 형식이지만, 전투는 젤다와 비슷한 칼질 액션이다. 동료들도 전투에 참여하는데,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할 수 있는 건 주인공뿐이다. 동료들에겐 각각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최대 5명이 전투에 참여하는, 당시로선 흔치 않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번거로운 점은 젤다처럼 적들이 필드에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랜덤 인카운트라는 점이다. 필드에선 적이 안 보이다가 갑자기 액션 전투로 바뀌는 식이다. 굳이 이렇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다.


대사창에 현재 지명이 나온다든가 이동 중 동료와 이야기할 수 있다든가 커서를 약 이름에 올리면 효능이 표시된다든가 하는 점은 슈퍼패미컴 RPG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다. 그 전까지 나온 패미컴 RPG보다는 진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비를 벗어야만 다른 장비를 장착할 수 있다든가 보물상자에서 꺼낸 무기가 어떤 캐릭터용인지 장착해봐야만 알 수 있다든가 하는, 세심하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마을의 사건에 관여하면서 진행된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목숨을 걸고 남의 일을 바로 돕는 주인공엔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다른 패미컴 RPG와 마찬가지로 세밀한 심리 묘사까진 안 나오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벤트들은 특색이 없다고 해야 하나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 거쳐야 할 과정이 생략되어서 느닷없는 부분도 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어떤 일을 벌인다면 그 낌새를 먼저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걸 플레이어는 몰랐는데, 일을 벌이고 나중에 단 한 마디로 설명하면 감정 이입하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복선이 부족하다.


그리고 뺑뺑이 돌리는 이벤트가 꽤 있다. 같은 곳을 몇 번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지도도 없고 워프 마법도 없고 비공정도 없어서 꽤 피곤하다.
단점만 많이 적었는데, 그나마 특색 있는 점을 꼽자면 후반부에 반전이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왕도물로 끝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란 설정이 이미 반전을 예고한 것이라 딱히 놀라진 않았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엔딩을 보면 다른 세계의 존재가 언급된다. 제목에는 '여명편'으로 적혀 있어서 아마도 속편까지 생각하고 만든 것 같은데, 판매량이 별로였는지 속편이 나오지 못했다. 이게 성공했다면 테크모에서 자사의 RPG 브랜드로 밀었을 것이다.


문제점이 있어서 걸작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시 패미컴 RPG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럭저럭 평작 이상의 점수는 줄 수 있겠다.

2018-02-16

악마성 드라큘라 칠흑의 전주곡


아무 생각 없이 3DS 켰다가 gameyob 에뮬로 엔딩까지 갔다.
악마성 드라큘라 시리즈는 몇 가지 깼는데, 이 게임은 패미컴판 악마성보다 훨씬 과거의 이야기라고 한다. 시리즈 처음으로 여자 주인공을 내세웠다. 뱀파이어 헌터 가문 벨몬드의 자손 '소니아 벨몬드'가 주인공이다.
뱀파이어 헌터는 채찍이 무기인데, 소니아의 채찍은 무척 짧다. 채찍이 아니라 단검인 줄 알았을 정도다. 난이도는 중간 수준.


게임보이 게임이라 그래픽도 구리고, 딱히 놀라운 연출은 없다. 악마성 시리즈 중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길래 그래픽 향상 패치를 했다. '사요나라 변발'이란 패치인데, 주인공 머리 스타일, 적, 아이템의 그래픽이 다소 바뀐다. 주인공의 외모를 일러스트에 가깝게 바꾼 것 같다. 패치를 해도 크게 좋은 줄은 모르겠다.


후반부에 드라큘라와 인간의 자식 알카드도 나온다. 주인공과 같은 목적(드라큘라 격퇴)이면서도 주인공에게 싸움을 걸어서 길을 막는다. 누가 드라큘라를 이길 수 있는지 힘을 겨뤄보자는 것이다. 그냥 둘이 힘을 합쳐 싸우면 쉬울 텐데 굳이 왜 싸울까?

진 엔딩 화면

악마성답게 숨겨진 요소가 있다. 스테이지마다 컬렉션 아이템이 숨겨져 있는데, 5개를 다 모은 상태에서 끝판왕 드라큘라를 이기면, 엔딩 마지막에 그림 한 장 더 나온다. 하지만, 그것까지 다 찾아가면서 할 정도로 재밌는 게임은 아니라서 평범한 엔딩만 봤다. 그냥 인터넷으로 진 엔딩 그림 확인. 주인공이 아이를 낳은 걸 보여주는데, 저 아기가 초대 악마성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닐까 추정한다.


엔딩 본 날 - 2018년 2월 16일

2018-02-10

울티마4 패미컴판


패미컴판 울티마4는 <울티마 -성자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컨버전되었는데,
원판을 그대로 이식한 게아니라 일본 드퀘 스타일로 바꿔서 이식했습니다.
덕분에 JRPG에 익숙한 사람은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어 있죠.

원판 울티마4는 해본 적이 없는데, 패미컴판으로 잠시 해봤습니다.

이식은 포니캐년이 맡았는데, 이 제작사 게임은 콘솔 시절 딱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B급이란 인식이 있습니다. 패미컴으로 제가 했던 포니캐년의 게임은 슈퍼스타 프로레슬링 정도. 밸런스가 문제였죠.
우려와 달리 첫인상은 깔끔한 편입니다.


철학적인 질문에 답하면 캐릭터가 만들어집니다. 전 DRUIDS가 나왔네요.


그래픽이나 UI는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와 흡사합니다. 원판보단 컬러풀하고 귀여워졌습니다.
사실 울티마 시리즈가 드래곤 퀘스트의 아버지격인 작품이죠. 울티마가 없었으면 드래곤 퀘스트도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패미컴판 울티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식격인 드퀘 스타일을 따라갔습니다.
일본 유저를 위한 거겠죠. 그래픽뿐 아니라 식량 등 일부 요소가 삭제되거나 간략해져서 원작팬들에겐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습니다. BGM도 다 바뀌었고, 무엇보다 전투가 랜덤인카운트 방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게임의 목적은 JRPG처럼 라스트보스를 찾아서 무찌르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성자 '아바타'가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고 덕을 쌓아서 세상 사람을 좋은 쪽으로 이끌 리더(지도자? 성직자?)가 되는 것이죠.

막상 게임을 시작해서 로드 브리티쉬 성과 마을 돌아다녀보면 대사들이 맥락이 없습니다.뭔가 해결해달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 아이템이나 신전 위치 등의 정보를 얘기합니다. 특별한 스토리가 없습니다.
정보도 불친절한 편이라 뭘 해야 할지 막막하죠.
JRPG의 외형을 채용했지만, 역시 서양 RPG인지라
해야 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자유도는 높습니다. 깨는 순서는 마음대로. 아무나 공격할 수 있습니다. 행인을 때려눕힐 수도 있고 선원들을 죽이고 배를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클리어하려면
성실, 자비, 용기, 정의, 헌신, 명예, 정신, 겸허... 이 8개의 덕을 쌓기 위해 아이템을 찾고 신전에서 명상을 해야 합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배풀기도 해야 하고요.


맵은 광활한 편인데, 당장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필드는 랜덤 인카운트 방식 전투인데, 턴제 시뮬레이션 방식이라 전투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마법 쓰지 않으면 도망도 못 침. 던전에선 또 3D 맵방식이라 길찾기에 애먹습니다.

이 게임, 굉장히 노가다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성과 인내가 없으면 엔딩 보기란 불가능.
성자가 되는 일이 원래 고난과 수행의 길이니 게임에서도 그걸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적인 게임이란 건 충분히 알겠습니다.

울티마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했는데, 잠시 체험해본 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엔딩은 유튜브로 확인했는데, 간단히 스탭롤 나오고 허무하게 끝이네요.

2018-02-09

저스트 브리드


에닉스 최후의 패미컴 게임.
1992년 12월 15일에 나왔는데, 이 시기는 슈퍼패미컴이 발매된 지도 2년이 넘어서 패미컴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더구나 슈퍼패미컴의 대작 RPG, 드래곤 퀘스트5(1992년 9월 27일)와 파이널 판타지5(1992년 12월 6일)가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저스트 브리드는 완전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가격은 무슨 배짱으로 매겼는지 코에이 게임급 가격인 9700엔. 9600엔에 나온 드래곤 퀘스트5보다도 비쌌다. 그러니 당시에 누가 이걸 선뜻 샀을까.


시대를 잘못 만났지만, 완성도는 패미컴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진부터 호화롭다. 캐릭터 디자인은 3x3아이즈의 다카타 유조, 음악은 애니 OST 작곡가로 유명한 다나카 코헤이, 프로그램은 모리타 카즈로 등 실력파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패미컴 게임들은 용량 문제로 한자와 가타카나 없이 히라가나로만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게임은 당시로선 대용량인 6메가비트(=약 750킬로바이트) 롬을 써서 글자 크기를 키우고 한자와 가타카나를 넣었다(참고로 드래곤 퀘스트4와 라그랑주 포인트가 4메가비트였다). 덕분에 패미컴 RPG에선 드물게도 가타카나로 주인공 이름을 입력할 수 있고, 메뉴 등에 한자가 섞여 나온다.


처음 실행했을 때, 패미컴 수준을 뛰어넘는 완성도에 놀랐다. 마치 슈퍼패미컴의 상급 RPG를 하는 것 같았다. 패미컴 전성기에 나왔다면 그해 최고 게임 자리에 올랐을 것이고, 길이 남을 명작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늦게 낼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완성도에 견주어 너무 안 알려졌다.


에닉스 게임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드래곤 퀘스트 느낌이 있다. 캐릭터 그래픽과 기본 시스템이 드퀘풍이다. 그런데 전투는 파이어 엠블렘, 샤이닝 포스 같은 턴제 시뮬레이션 방식이다. 그 게임들과 다른 점이라면 적을 공격할 때 별개의 화면이 나오는 게 아니라 필드 위에서 그대로 전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없는 샤이닝 포스라고 해야 하나. 썰렁할 것 같지만, 마법 효과도 표현되고 나름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이런 시스템에선 보통 공격한 뒤 적의 반격을 받는데, 이 게임은 공격할 땐 반격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좀 느긋하게 할 수 있다. 다만, 한 스테이지를 끝내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다. 적을 전멸시키거나 주인공을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하면 전투가 끝난다. 그리고 리더마다 5명씩 부하가 있다. 리더는 자기 부하들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안 되는 제약이 있다. 야외 전투에선 부하들을 조작할 수 있는데, 던전이나 성내 전투엔 리더들만 참여한다.
시뮬레이션 전투이지만, 캐릭터별 상성은 없는 것 같고 그냥 레벨 많이 올려놓는 게 유리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사파이어의 가호로 평화를 유지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 사파이어는 전설 속 성스러운 돌 중 하나이며, 이 돌을 대대로 물려받은 가문의 자손을 사람들은 '사제'라고 부르며 우러러봤다.
1년에 한 번 있는 사파이어 축제의 밤. 그 어느 때보다 축제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새 사제이자 주인공의 연인인 피리스가 첫 번째로 의식을 치르는 날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앞서 주인공과 피리스가 잠시 얘기를 나누던 중, 피리스는 주인공의 눈앞에서 몬스터들에게 납치되고 만다. 마을의 기사인 주인공은 연인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떠난 18세 주인공이 결국 세상을 구한다는, 흔한 왕도물이다. 제목의 뜻도 그런 느낌이다. 후반부 대사에 나오지만, '저스트 브리드(Just Breed)'는 '세상에 정의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란다.
뻔한 이야기라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다른데, 이 게임은 전개가 매끄럽고 연출이 세심하다. 캐릭터의 인간미와 리얼리티가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들었다. 복선도 좋고 캐릭터가 잘 살아 있다. 패미컴 RPG에선 보기 드문 완성도다.


흠을 잡자면, 당시 시대가 그런지 몰라도 내용이 남성 중심으로 전개된다. 납치된 6명의 여성 사제를 구하는 이야기인지라 여성은 그냥 소품 역할에 가깝다. 후반부에 여전사 한 명이 합류하긴 하지만, 비중이 작다. 요즘 여성이 보면 거북해할 만한 부분도 있다. 드래곤 퀘스트의 '파후파후' 비슷한 게 여기서도 나오며, 어떤 노인이 여성 캐릭터에게 날리는 대사는 대놓고 성추행 발언이다. 드래곤볼이나 시티헌터에서 그런 게 자유롭게 묘사되던 시절이니 지금과는 다르다.


진행하면서 워프 마법이 있어서 편했다. 드퀘와 달리 지붕이 있는 장소에서도 워프할 수 있다. 필드 전투에서도 부하 자동 조작이 있어서 편하다. B, C급 RPG에선 이런 부분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데, 저스트 브리드는 세심함이 엿보인다.


패미컴의 황혼을 장식한 RPG답게 마지막 역량을 다 짜내서 마무리한 걸작 RPG라고 생각한다.


엔딩 본 날 - 2018년 2월 9일

2018-02-07

블러디 워리어즈 - 샨고의 역습


1990년 10월 토에이 동화가 발매한 RPG. 배경이 특이해서 해봤다. 흔한 중세 판타지가 아니라 양키 센스의 야만족 이야기다. 마법도 쓸 수 없다.


카루와리오 사령관이 이끄는 스칸바 교단은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샨고를 침략한다. 결국, 교단은 성지 앙가루를 점령하고 카루와리오는 황제가 된다. 그러나 카루와리오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는 전설로 내려오는 8개의 성스러운 돌을 찾아내서 무적의 힘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위협을 느낀 타그슈아 마을의 족장은 주인공에게 카루와리오의 야망을 저지해달라고 부탁한다.


패미컴 RPG는 보통 10대 소년이 주인공인데, 블러디 워리어즈의 주인공은 다 큰 딸을 둔 아저씨다. 무척 험악하게 생겼다.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이 게임, 여성의 비중이 거의 없다. 동료가 되는 여성도 없고 중요인물도 죄다 남자다. 얼굴 제대로 나오는 건 주인공 딸이 유일하다.


그래픽은 패미컴 수준에선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시스템이 구리다. 기본 메뉴가 '말하기, 도구, 조사하다'밖에 없다. 스테더스는 어디서 확인하나 했더니 조사하다를 눌러야 고를 수 있었다. 아이템은 버릴 수가 없다. 불필요한 아이템은 가게에다 팔아야 하는데, 가게에서도 팔기 메뉴가 따로 없다. 점원이 "쓸만한 것 사시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아뇨"를 누르면 그럼 뭘 팔겠느냐고 물어본다. 별로 생각 안 하고 대충 만든 느낌이다.


필드 전투는 흔한 드퀘 방식이다. 동료가 여러 명일 때는 전투할 때마다 4명을 선택해야 해서 귀찮다. 군대끼리 싸울 때는 턴제 시뮬레이션 형식으로 바뀐다. 여기선 주인공과 동료가 아니라 상점에서 산 군대로 싸운다. 많이 사서 물량 공세를 펼치면 수월하다. 유니트별 상성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돈 많으면 장땡이다. 궁병, 보병, 포병뿐 아니라 투석기, 오토바이병, 전투차량도 있다. 자동차가 있는 문명이라면 왜 탈것으로 안 나왔는지 의문이다.


새 동료나 보스가 등장할 땐 이벤트신이 나온다. 주인공 포함해서 외모가 다들 괴기스럽다. 외모는 개성이 넘치는데, 성격이나 감정이 드러나는 대사가 거의 없어서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이야기는 평이하게 흘러가며 어떤 드라마틱한 요소도 없다. 필요한 아이템 모으고 적을 물리치는 게 다다. 스토리보단 이벤트 해결에서 재미를 찾으라는 건가? 그 과정도 대부분 단순하다.


지도는 넓은 편인데, 힌트는 적어서 진행이 쉽지는 않다. 특히 끝판왕으로 가는 길은 숨겨져 있어서 공략 없으면 찾기 힘들 것 같다.


RPG치고 내용이 짧다. 헤매지만 않는다면 한 7시간 정도면 클리어할 수 있다. 제작자도 그게 걸렸는지 막판엔 플레이타임을 억지로 늘리는 선택을 했다. 맥락 없이 처음 시작했던 마을로 돌아간다든가, 끝판왕 던전을 두 번 가야 한다든가...
패미컴 초창기 RPG라면 수긍하겠지만, 1990년 10월이면 패미컴이 저무는 시기인데, 이 정도 완성도라니 실망스럽다.
흔치 않은 배경 말고는 아무런 장점도 없는 RPG.


엔딩 본 날 - 2018년 2월 7일